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한 직후 서울에는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고, 남북한에는 미국군과 소련군이 각각 진주하여 서로 다른 정세가 진행되었다. 일제치하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했던 오기섭 . 정달헌 . 주영하(함남), 김채룡(함북), 현준혁(평남), 박균 . 백용구 . 김재갑 . 김인직(평북), 김덕영 . 송봉욱(황해도) 등의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평양(현준혁)을 제외한 함흥, 원산, 청진, 신의주, 해주 등의 북한 주요 도시에서는 박헌영의 지시를 받고 있던 토착공산주의자(국내계)들이 당조직을 주도하였는데, 북한지역에서는 현준혁과 오기섭이 이 시기 공산주의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10월에 조선공산당 서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에서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정치투쟁을 거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조공분국)이 설치되었다. 조공분국의 성립과정에서는 김일성파와 국내계 공산주의자들간의 대립이 있었는데 김일성파는 12월 초순에 ‘공산당의 조직과 정치 . 행정 경험이 있는’ 소련의 한인 3진이 도착함으로써 세력이 강화되었다. 이들은 김일성을 지원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돕기 위하여 소련에서 온 사람들로 북한에서 당과 국가기관의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였다.
9월에 입국하여 활동을 전개해 왔던 김일성은 국내계의 일부와 소련계의 지원을 받아 12월의 조공분국 제3차확대집행위원회에서 책임비서로 선출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토대로 조공분국을 주도하고 당 내외에 대한 통일된 지도를 시도하게 되었다. 이들 소련계는 출신지역상으로는 동일하지만 당 내에서 독립적인 파벌을 형성하지 않았고, 소련의 정책과 ‘공산당의 조직 원칙’에 따라 김일성을 적극 지원했다.
1945년 10월의 북한지역 각 도 . 시 . 군과 다수의 지방에 당위원회와 당세포가 조직되었지만, 공산당원은 1,000명 수준이었다. 그러나 12월이 되어서는 공산당원수는 7천 명까지 성장하였고 각 도 . 군 . 면 및 도시에 당지도위원회들이 조직되었으며 많은 수의 공장, 기업소 및 농촌에 공산당세포가 조직되었다. 당시의 조공분국 당원을 7천 명으로 보면 북한 주민 약 1만 명에 당원 7명 수준으로 조직이 미숙했음을 알 수 있다.
<필자 : 이주철>
해방 직후 북한지역 공산당 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