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궁궐의 이름은 무엇인가? 많이 알려져 있는 이름으로는 “만월대(滿月臺)” 혹은 “망월대(望月臺)”, 연경궁이란 이름이다. 그러나 ‘대(臺)’로 끝나는 이름들은 조선시대, 14-15세기에 들어 붙여진 것들이며, 연경궁은 고려 법궁이 아닌 이궁의 이름이었다. 이렇게 이름을 제대로 알 수 없다면, 혹시 원래 이름이 없었던 것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었을까?


 








< 만월대 전경 >


 


‘천자의 나라’인 중국의 경우, 궁궐의 이름이 없는 경우도 많아서 대내(大內)라고 불리거나 황성이라고 불리는 데 그쳤다. 이를 보면, 이름이 없었던 것은 어쩌면 천자국을 자처했던 고려인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고려사]의 기록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이름은 ‘본궐(本闕)’이다. 이 이름이 만월대보다는 나을 듯하다.








< 만월대>


 


<본궐의 역사>

본궐은 궁예가 개경에 도읍을 정했을 당시 지어진 송악 궁궐에서 출발하여,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에도 이를 그대로 쓴 것으로 짐작된다. 궁예 때 창건되어 961~963년(광종 12~24) 사이에 대규모 증축을 거치기도 했던 본궐은 세기가 바뀐 1011년(현종 2) 거란의 침입에 모조리 소진되는 불행을 맞는다. 현종은 거란이 물러간 후 나주에서 개경으로 돌아와 2년에 걸쳐 궁궐을 중건하였다. 그 후에도 개경이 내란과 외우에 시달릴 때마다, 어김없이 본궐은 그 중심에서 화를 입어야 했다. 1126년(인종 4) 이자겸ㆍ척준경의 난 때문에, 1171년(명종 1)에는 화재로, 1220년 강화 천도로, 1362년(공민왕 11)에는 홍건적의 난으로 개경의 본궐은 모두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인종 때 궁궐 안으로 들어가려던 이자겸ㆍ척준경 일당은 한밤중에 궁성의 동쪽 성문인 동화문에 불을 질러 버렸다. 궁인들을 비롯하여 모두들 혼비백산하여 흩어졌고, 불길은 잡을 수가 없었다. 100여 년간 유지되어온 본궐이 내란으로 다 타버린 것은 인종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자겸의 난이 수습된 후 인종은 궁궐을 중수하며, 전각 이름을 모조리 바꾸어 버리는 ‘대역사’를 단행하였다.


 








< 신봉문터 >


 


본궐의 권위가 다시금 크게 위협받은 것은 몽고와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무인정권에 의해 강화도로 천도가 단행된 때였다.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면서 집권자들은 궁전은 물론, 절들의 명칭까지도 모두 송도의 것을 따랐다고 한다. 그렇다고 개경의 본궐을 완전히 포기한 채 내버려둔 것은 아니었으나, 주인 없고 사는 이 없는 궁궐은 금세 황폐화되었다.


 








<본궐 복원모형>


 


몽고와 강화를 맺은 후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돌아온 다음에 본궐도 다시 건설되었다. 그러나 예전 만한 위용을 자랑하지는 못하였고, 이후 왕들은 본궐보다는 사판궁·제상궁·남산궁 등 이궁에서 주로 거처하였다. 본궐에서는 왕이 실질적으로 거주하면서 정사를 행했다는 증거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 반면, 주로 각종 불교 도량 같은 종교 행사나 사신 접대, 즉위식이 열려, 주로 의식 공간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개경 환도 후 대부분의 즉위식은 바로 본궐에서 거행되었다.


고려 후기 이궁들의 운영 과정을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전대의 왕이 사용한 궁궐이 그를 계승한 왕에 의해 철거당하고 새로운 궁궐이 창건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이후에도 큰 영향을 미쳐, 조선 초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성계가 적극적으로 천도를 원했던 것, 태종이 한양으로 돌아오면서 이미 건설된 부왕의 궁궐인 경복궁을 거부하고 자신의 궁궐인 창덕궁을 건설한 것 등은 원간섭기 이래로 변화된 궁궐 운영 방식을 그대로 반영한다.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의 침입으로 다시금 본궐이 불타버린 이후로는 본궐은 중창되지 못했다. 대규모 궁궐을 중창할 정도의 여력이 없기도 했을 뿐 아니라, 개경환도 이후 본궐에 대한 거리낌이 늘었던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본궐 복원도>


 


<본궐 전각의 구조와 기능>

고려의 법궁인 본궐은 동아시아의 궁궐 건축 규범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그를 뛰어넘는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본궐은 제후의 예를 따라 3문을 택하였지만, 그 장식이나 이름에서는 천자의 것을 마음껏 사용했다. 본궐의 정전인 회경전 같은 경우에는 송 궁궐의 정전 이름과 같은 한자인 ‘경(慶)’자를 차용한 것이다.


본궐은 세 구역으로 구분되는데, 유구가 가장 잘 남아 있는 회경전 구역과 그 서쪽의 건덕전 구역으로 추정되는 지역, 회경전 구역의 서북쪽인 침전 구역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건덕전 구역이 처음으로 궁궐을 건설한 초창 지역으로 보이고, 현종 4년에 대규모로 궁궐을 중수하면서 회경전 영역을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궐의 전각들 중에서 회경전 구역은 의례용 공간이었다. 정전이었던 회경전은 웅장하고 화려하기가 모든 전각 중 제일이었다는데, 터 높이만도 5장이(약 10-15m 정도) 넘고, 동서 양쪽의 섬돌을 붉게 칠하고 난간은 구리로 만든 꽃으로 꾸몄다고 한다. 외부에서 정전인 회경전(선경전)으로 들어가는 길을 상상해보자. 궁궐 안으로 들어간다는 설레는 마음을 품고 궁궐의 정남문인 승평문의 문턱을 넘어 서면, 긴 담장으로 둘러싸인 넓은 구정이 보인다. 그곳을 가로질러 가면, 신봉문이 의젓하게 버티고 있고, 그를 넘어서면 다시 겹겹이 창합문이 보인다. 창합문을 넘어서야 회경전 일곽에 접근하게 된다.


 








<본궐의 배치 추정도>


 


의식용 공간 외에도 회경전에 버금갈 만한 건물이 건덕전(乾德殿)이었다. 건덕전은 그 기능으로 볼 때 편전이라기 보다는 회경전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그보다 약간 등급을 낮춰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사신을 접대하더라도, 송의 사신은 대부분 회경전에서 맞았으나, 금이나 요의 사신들은 회경전에서 맞은 경우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 건덕전에서 맞는 데 그쳤다. 이 점은 중화와 오랑캐를 엄밀히 구분하였던 고려인들의 천하관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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