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 시가도>


 


고려시대 개경 제1의 번화가는 어디였을까? 황성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나와 동쪽으로 난 관청거리(관도)를 지나면 남쪽으로 남대가가 있고, 이 길이 나성의 서문인 선의문(오정문)과 동문인 숭인문으로 이어진 동서 간선도로와 만날 때까지 이어지는데, 이곳이 바로 개경의 중심가인 십자가이다. 남대가에는 시전의 긴 행랑이 좌우로 늘어서 십자가까지 이어졌다. 또 남대가 북쪽에는 흥국사라는 큰절이 있어서 이곳 남대가 주변에는 관리와 상인을 비롯한 여러 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십자가의 동서 방향의 도로를 따라서는 앵계라고 불리는 개천이 나란히 흐르면서 운치를 자아냈으니, 한양의 종로거리와 나란히 흘렀던 청계천의 모습과 흡사하였다. 그 옆의 길가에도 여러 종류의 물건을 파는 가게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십자가 주변에 있는 민천사ㆍ보제사ㆍ봉은사 등 큰절에서는 간간이 커다란 불교행사가 열려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고려 제1의 간선로 – 서경으로, 그리고 벽란도로>


 








<벽란도 상상도>


 


십자가에서 서쪽으로는 나성의 선의문으로 이어진다. 이 선의문 밖 일대를 가리켜 서교(西郊)라고 불렀으며, 선의문과 서교는 개경의 서쪽 관문이었다. 선의문 밖 서교에서는 길이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진다.
그 중에서 북쪽으로 ‘개경-서경-의주’를 잇는 도로는 고려의 중추적인 간선로였다. 특히 서경은 고려 제2의 도시로서 국왕이 자주 행차한 곳이었으며, 중국 사신왕래에도 이용되었다. 또한 이 길은 침략로가 되기도 하였다. 고려전기 거란군이나 고려말의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할 때 그들은 이 길로 들어왔다.
한편 선의문에서 서쪽으로 계속 가면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碧瀾渡)를 만난다. 벽란도는 송나라의 사신이나 상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멀리 동남아ㆍ아라비아의 상인들도 내왕하였던 개경의 해상관문이자 국제무역항이었다. 이곳이 이렇듯 붐비게 되자, 조정에서는 벽란도에 외국의 사신이나 상인이 머물 수 있도록 객관을 짓고 이름을 ‘벽란정(碧瀾亭)’이라고 하였다. 예성강의 ‘예성(禮成)’이라는 명칭도 고려에서 송나라에 조회할 사신을 보낼 때에 모두 이 곳에서 배를 띄웠다는 데서 기원하였다 한다.


 


<승천포를 거쳐 강화도로>


 


십자가로부터 남쪽 방면으로 길을 떠나보자. 십자가 바로 남쪽에는 저교(猪橋)라는 다리가 있었고, 저교에서 남쪽으로 계속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해발 177m의 용수산이 솟아 있는데, 그 자락에 있는 나성 회빈문을 거쳐 성밖으로 나오게 된다. 1113년(예종 8)에 지은 경천사라는 큰절이 있었던 곳도 바로 회빈문 밖이었으며, 그 곳에서 서남쪽으로 향하면 정주(貞州, 1108년 승천부로 승격)를 거쳐 강화도 방면의 뱃길로 연결되었다. 이 길은 1232년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서울을 옮길 때 천도행렬이 지났던 길인데, 당시 왕과 최이 일행이 하루 묵었던 곳이 경천사였다. 이후 승천부는 고려조정의 강화 천도이후 고려와 몽고군 사이의 교섭장소로서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한편 회빈문 밖에서 동남쪽으로 향하면 율곡 이이와 이순신의 본관으로 유명한 덕수현이 나타난다. 이 덕수현의 남쪽에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흐르는 강, 곧 조강이 흐르고 있는데, 조강 나루(祖江渡)는 바로 여기에 설치된 나루였다. 이곳은 주로 김포ㆍ수주(지금의 부평)?인주(지금의 인천) 방면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이용하였는데, 승천포 앞바다의 풍랑이 거세지면 개경에서 강화 방면으로 왕래하는 사람들도 조강을 건너 육지로 30여 리를 간 다음, 지금의 강화대교가 놓여있는 갑곶나루를 건너 강화에 도착하였다.


 


<임진나루의 명물, ‘배다리’를 건너 하삼도로>


 


십자가에서 회빈문 방면으로 향하다가 저교의 남쪽에서 동남쪽으로 방향을 틀면 탁타교가 나온다. 탁타교의 원래 이름은 만부교였는데, 고려 태조 때 거란이 보낸 낙타 50마리를 이 다리 아래 매어두어 모두 굶어 죽였다 하여 탁타교라 이름하였다 한다.
저교로부터 만부교를 지나 나성의 보정문을 거쳐 동남쪽으로 향하는 길은 지금의 충청, 전라, 경상도로 향하는 도로였다. 이 일대는 임진현으로 편성되었으며, 이곳에서 강을 건너면 남경(지금의 서울) 방면으로 연결되었다. 이 나루를 임진나루라고 불렀는데, 이곳을 건너는 인파는 항상 끊이지 않았다. 지나는 사람들이 서로 먼저 강을 건너려 하다가 물에 빠져 죽는 경우가 자주 생기게 되자, 조정에서는 이곳에 배다리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한편 임진현 서쪽 15리 지점에 위치하였던 동강은 개경 쪽에서 임진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류인 사천의 하구에 있었는데, 동강은 예성강 하구의 서강과 더불어 조운을 통하여 전국 각지로부터 개경으로 운반되는 세곡의 도착지였다.


 








<선죽교>


 


<선죽교를 지나 동쪽으로>


 


다시 개경 안의 십자가로 돌아와 동쪽 방면으로 길을 떠나보자. 십자가의 바로 동쪽에는 풍교라는 다리가 있었으며, 그 아래에 흐르는 물을 배천(白川)이라고 불렀다. 풍교의 동쪽에는 고려와 운명을 함께 한 충신 정몽주(1337~1392)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선죽교가 있다. 선죽교를 지나 동쪽으로 향하면 나성의 동쪽 성문인 숭인문과 만나게 된다. 앞서의 보정문 밖과 더불어 숭인문 밖 일대는 동교에 포함되었다.
숭인문 밖에서 동남 방면으로 향하면 장단나루를 지나 남경으로 통하는 길이 나 있었다. 이 길은 보정문과 청교역을 지나 임진도를 건너 남경으로 향하는 길과 함께 고려초기 이래 개경과 남경을 연결하는 주요한 도로였다. 강조의 정변으로 인하여 왕위에서 밀려난 목종은 이 길을 따라 충주로 귀양가다가 적성현(지금의 경기도 연천군)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거란의 2차 침입으로 인하여 현종이 나주로 몽진했을 때와 고려말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했을 때에도 역시 이 길을 이용하였다. 특히 이 길을 통하여 남경으로 가기 위해서는 임진나루보다 상류에 있는 장단나루를 통해서 임진강을 건너야 했다. 이 장단나루는 현재 ‘고랑포’라는 지명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양편 언덕에는 지금도 푸른 석벽이 수십 리를 면하여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굽이굽이 경승지를 따라 박연폭포로>


 








<박연폭포>


 


개경의 북쪽에는 송악산과 천마산이 가로막고 있어 큰 길이 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송악산 기슭에는 귀산사와 안화사 등과 같은 큰절이 있었으며, 송악산의 계곡물이 시원스레 흘렀던 자하동 일대는 도성 안 제1의 경승지로 꼽혔다.
자하동을 지나서 송악산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면 나성의 탄현문에 이르게 된다. 탄현문 안쪽에는 국자감의 후신으로서 지금의 최고국립교육기관 격인 성균관, 그리고 현성사와 같은 절이 있었다. 탄현문 밖 일대는 험한 산세와 깊은 계곡으로 인하여 개경 근교의 주요한 경승지가 되었으니, 그 유명한 박연폭포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박진사라는 사람이 폭포 밑의 못 위에서 피리를 불자, 못 안의 용녀가 감동하여 데려다가 남편으로 삼았기 때문에 폭포 이름을 ‘박연(朴淵)’이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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