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의 개성 시전거리>


 


개경의 시장은 도성 중심의 십자가와 연결된 관도들과 그에 가까운 주변 지역들에 집중 분포하였는데, 그 중심은 역시 시전 거리이다. 시전은 왕실과 관청에서 쓰는 물품을 조달하려고 나라에서 설치한 어용적 성격의 시장이면서 벼슬아치들의 사치품 등 개경 주민들이 사적으로 필요로 하는 물품들도 공급하는 대표적인 시장이었다.
시전거리는, 황성에서 광화문을 나와 조금 가다 바로 남쪽으로 꺾어 남쪽으로 십자가까지 나 있는 남대가라는 거리의 길 양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물론 이 밖에도 도성의 서대문격인 오정문(선의문)으로부터 동대문에 해당하는 숭인문으로 뻗은 대로변의 십자가 부근에 종이를 판매하던 지전이 있었고, 그 옆 하천변에는 말을 파는 마전이 있었다. 또 십자가 가까이 남대가의 동쪽에 자남산이라는 자그마한 산이 있는데, 그 기슭의 유암이라는 바위 가까이에는 기름을 팔던 유시가 있었다.
개경의 시장이 시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도성 주민들의 소소한 일상의 수요품들은 도성 내 곳곳의 일반 장시에서 거래되었다. 예컨대 도성 주변의 농민들이나 도성 주민들에 의해 생산된 야채, 과일, 땔감, 여가 시간에 만든 짚신이나 미투리 등의 소소한 물건들은 일반 장시에서 주로 거래되었다. 이런 장시들을 조선 태종 대의 기록에서는 여항소시(閭巷小市)라 하였다. 도성 내 곳곳에서 열리는 보잘것없고 영세한 시장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시전과 달리 나라에서 특별히 통제하거나 감독할 필요성이 적었다. 그저 파는 이와 사는 이가 서로 편리한 곳에서 알아서 거래하도록 내버려두면 될 것이었다.
그런데 대표적인 시장인 시전조차 유감스럽게도 그 건물의 구체적인 형상을 확인할 길이 없다. 단지 행랑을 단위로 건물 규모가 정해지고 있었다는 것만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모든 시전이 행랑을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니다. 마시(馬市)와 같은 가축 시장은 수가 많고 배설물 문제도 있어서 야외의 넓은 공간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의 상점들은 요즘과 크게 다른 점이 있었다. 고유한 상호가 없었던 것에다 더하여 종잇집인지 찻집인지를 알 수 있는 간판도 없었다.


<시장에서 팔리는 것들>


농사짓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개경에서는 역시 미곡류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상품이었다. 15세기 중엽의 수도 한양의 경우, 약 10여만 주민의 한 해 식량 소비량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20만 여석 이상이 상인들을 통해 공급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보면 고려시대 개경 시장에서 쌀ㆍ콩ㆍ조 등 미곡류의 거래규모가 가장 컸다고 생각된다.
필수품은 아니지만 차나 술, 주전부리도 빼놓을 수 없다. 차는 신라말 고려초 선종(禪宗) 불교의 성행과 더불어 고려시대에 널리 퍼진 음료이다. 술은 역시 이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술집들이 있었는데, 관청에서 기생까지 두고 운영한 주점들도 있지만, 개인이 운영한 사영 주점도 분명히 있었을 터이다. 당시 개경의 시장을 감독하던 경시서에는 자녀(姿女) 혹은 유녀(遊女) 등으로 불리는 기녀들의 장부가 있었는데, 12세기 초의 경우 300여명의 기녀들이 이 장부에 등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개경에는 한문을 구사하면서 다방면에 지식을 갖추고 있던 계층이 집중 거주하고 있었다. 자연히 시장에는 종이와 붓, 먹과 벼루 등과 같은 문방구류가 많이 거래되었다.
개경의 고급 관료나 귀부인들은 갖가지 색깔의 고급 비단으로 옷을 해 입었다. 개경에서 귀부인급에 들려면 겉옷은 물론이고 속바지까지도 견직물로 해 입어야 했고, 액세서리이던 향주머니 역시 무늬있는 비단으로 지어 갖고 다녔다. 꼭 귀부인이 아니어도 신분상 양반집의 여인이라면 끼니 걱정을 할지언정 외출 시에는 검은 색 비단 너울을 썼다. 가사(袈裟)라 불린 이 너울은 양반 신분의 표시이던 셈이다. 어디 여자들만이었겠는가? 개경의 웬만한 남자라면 거의 예외없이 비싼 비단으로 만든 두건을 쓰고 다녔다. 이런 이러한 것들의 재료가 되는 비단의 상당 부분이 개경의 시장에서 거래되었다.
멋을 내려면 옷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도 신경을 써야 한다. 개경의 여인들은 빗으로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한 후 가발을 아름답게 올렸다. 이에 따라 가발 재료인 다리도 시장에서 거래되었다. 머리모양과 함께 얼굴 피부도 잘 관리해야 했다. 그런 만큼 화장품과 그것을 담는 그릇도 중요한 거래물품이었다. 고려의 귀부인들은 면약(面藥)이라 불리던 미안수(美顔水)와 분(粉)을 많이 사용하다가, 후기에는 연지를 보다 많이 바르기 시작하였는데, 이런 물품들은 당연히 시장의 주요 품목이었을 것이다.


동서고금의 시장은 재화와 인간이 몰려드는 생기 넘친 삶의 무대이다. 개경의 시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시전이 집중된 남대가는 물건 사려는 주민과 상인들은 물론이고, 출퇴근하는 벼슬아치와 서리들, 드나드는 군인과 외국사신, 도성 밖에서 볼일 보러 온 사람들, 공물을 가지고 올라온 지방 향리들과 그 심부름꾼 등 많고 다양한 사람들로 붐볐다.
따라서 이 곳은 국내외의 제품이 몰려드는 교역의 공간일 뿐 아니라 통치자와 신민(臣民)이 만나는 하나의 광장이 되기도 하였다. 가난한 행인들이 식사나 음료를 얻어먹을 수 있었고, 죄를 지은 자를 수배하고 붙잡은 중죄인들을 무섭게 처단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새로운 집권세력이 자신들의 정책을 선전하는 이벤트 무대로도 활용하였다.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 일파가 구집권세력의 불법 토지를 빼앗아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 새 왕조 건설의 명분도 마련하기 위해 토지 문서를 모아 불태운 곳이 바로 이 곳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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