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 복원도>


 


 


고려시대 개경의 인구수에 대한 것으로는 1232년(고종 19) 강화도로 천도할 때의 개경 인구수가 10만 호였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 현재는 이 기록을 토대로 당시 개경 나성 안팎의 인구가 50만 명 정도였다고 추론하고 있으나 믿기에 조금 주저되는 것도 사실이다. 15세기 한양의 인구가 10여만으로 추정되는 점을 감안하면, 도성 밖 사교(四郊) 지역(도성 바로 바깥 동ㆍ서ㆍ남ㆍ북의 지역)의 인구를 포함한 것이라고 쳐도 여전히 과다하다. 그러나 10만 호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해도 개경 도성의 인구가 많았다는 것은 알 수 있으리라.


이렇게 많은 개경의 인구 중에는 왕족ㆍ관료 등을 비롯하여 각 관청에 소속되었던 서리와 잡류, 군인, 공장, 상인, 농민, 승려, 노비에서 외국인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개경에 계속 거주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들 중에는 기인(其人), 군인, 경주인(京主人), 외국 상인들처럼 일정기간 동안만 개경에 체류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또한 이들 중에는 왕족, 관료, 상인 등 경제력을 가진 자들과 그렇지 못한 일반 서민들이 뒤섞여 있었으며, 개경과 주변 지역에는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개경에 살았던 보통 사람들은 일반 군현에 살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조(租)[포(布)]역(役) 3세를 부담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개경의 경우에도 다른 군현과 마찬가지로 조세를 감면해 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개경에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고, 농민이 많지 않았기에, 농촌 지역 군현의 사람들과 똑같은 조세를 부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개경 사람들에게는 노동력을 징발당하는 역이 가장 큰 부담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기본세인 3세 중 개경의 일반 민들에게 가장 큰 부담이 역이었다면 일정 이상의 지위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부담하였던 것으로 과렴(科斂)이 있었다. 과렴은 급박한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 부담능력에 따라 차등 징수하는 일종의 임시세였다. 특히 국가의 재정상태가 악화되고 중국 원나라와의 관계 때문에 임시 수요가 급증하는 원종과 충렬왕 때 가장 빈번하게 과렴이 실시되었다. 과렴과 달리 국가운영에 필요한 노동력 자체를 품관으로부터 임시로 징발하는 것으로 품종(品從)이라는 것도 있었다. 즉 이것은 품관이 보유하고 있는 노비 등의 노동력을 국가의 역사에 일정 기간 동안 징발한 것으로서 넓은 의미의 역이지만, 자기가 직접 일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일반 사람들의 요역과는 달랐다. 품관이 품종을 내지 못할 경우 노동력 대신 현물로 역가(役價)를 징수하기도 하였으며, 역부를 고용하여 부역하기도 하였다. 수도에 산다는 것은 이렇듯 부담해야 하는 세금 종류가 달랐을 만큼, 조금은 특별한 것이었다. 어떻든 그들은 왕을 접할 기회도 잦았고, 훨씬 다양하며 질좋은 물건들을 접할 수도 있었다. 권력의 중심지였던 만큼 뜨내기도 많았지만, 오래 살아온 사람들의 자부심도 대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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