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천사 10층석탑>


 


 


조선시대의 개성부는 갑오개혁이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개성군이 되었다가 일제 식민지 치하에 들어가면서 몇 차례 변동을 다시 겪게 된다. 1914년 개성은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이 되었다가, 1930년에는 시내 지역은 개성부, 외곽 지역은 개풍군으로 개편되어, 시내와 시외가 분리되었다.


일제강점기 개성은 식민수탈의 전형을 보여주는 곳이 되었다. 우선 일제는 조선총독부 주도 아래 홍삼전매권을 탈취하는 것을 비롯하여 적극적으로 개경의 상업권을 장악하려고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 문화재와 고려 왕릉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의 약탈을 감행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복궁에 덩그렇게 서있었던 경천사 10층 석탑은 바로 이런 약탈의 전형적인 예이다. 1909년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顯)는 이 탑을 불법으로 해체해서 반출했다. 이후에 다시 반환되기는 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손상을 많이 입고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되었다.


이 탑이 그나마 제 모습 그대로 다시 설 수 있게 된 것은 수십 년이 흐른 후였고, 현재 재정비하기 위해 일반 공개가 되지 않고 있다. 그래도 이러한 약탈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일제 시기 개성 사람들의 노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개성보존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문화재 보호에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는데, 이 노력을 바탕으로 서울.평양.경주.부여 등과 함께 개성에 박물관이 들어설 수 있었다.


 








<개성의 현재 모습>


 


8.15 해방과 더불어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지면서 한반도의 중심에 있던 개성의 중심부는 남쪽에 속하게 되었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개성은 열강의 이데올로기의 대결과 힘의 각축장이 되었고, 그 결과 고려시대 수도였던 개성은 그 흔적조차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전쟁의 참화를 입게 되었다. 한국전쟁의 초기에는 개성이 전선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미군의 폭격으로 모든 건물이 사라질 정도로 폐허가 되었다. 심지어 고려시대 궁궐터인 만월대 일부가 미군의 야전병원을 만들기 위해서 불도저로 파헤쳐지기까지 하였다.

휴전 후 개성은 북한에 편입되었고, 이후 이산가족이 제일 많은 도시가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인 1955년 북한의 행정기구 개편에 따라 개성은 개성시와 개풍군 판문군을 포괄하여 직할시로 편성되었으며, 1957년 여기에 장풍군이 편입된 바 있다. 2002년 11월에 ‘개성공업지구’가 선포되면서 판문군이 폐지되고 개풍군과 장풍군을 분리, 개성직할시는 ‘개성시’로 다시 바뀌어 현재는 황해북도에 편입되어 있다.


냉전 시대 개성은 버려진 도시에 가까웠다. 그러나 한반도의 화해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조건은 오히려 새로운 전기로 작용하였다.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서, 급기야 현대아산이 개성주변에 공단을 조성하고 관광사업을 하기로 북한과 합의하게 되면서 개성은 잊혀진 도시에서 각광받는 도시로 떠오른 것이다. 본격적인 남북경제협력의 시금석으로서, 보존해야할 역사도시로서 개성은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때의 감격도 잠시, 급변하는 국제 정세는 우리에게 가까운 미래에 대해서 추측해보는 것도 힘들게 만들고 있다.


개성은 앞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것인가. 질문과 동시에 자문해본다. 우리는 개성을 어떻게 다듬고 발전시켜나갈 것인가? 적합한 절차, 장기적인 안목, 과거와 미래의 현명한 조화. 우리는 발전의 올바른 방향을 알고 있다. 조건만 구비된다면, 곧 그것을 실현할 수 있기만을 희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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