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보 항일 전적지

북한 음악의 시대별 변천사


 


북한의 음악사는 이른바 ‘타도 제국주의 동맹’이 결성된 해인 1926년을 기점으로 하고 있으며, 대략 8기로 나뉘어진다.


제1기는 1926년부터 1945년 8월까지이고, ‘항일무장 투쟁시기의 음악’으로 명명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신민요와 혁명가요가 등장하였는데, 북한에서는 이를 북한음악의 뿌리라고 보고 있다.


제2기는 1945년 8월에서 1950년 6월까지이고, ‘평화적 건설시기의 조선음악’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시기에는 당성·인민성·계급성이라고 하는 레닌주의적 문예관을 정책화하여 그것을 음악에 반영토록 하였다. 이 시기의 음악은 뚜렷한 사상적 지향성과 정치적 민감성 그리고 강력한 호소성과 선동성을 특 징으로 하고 있다.


제3기는 1950년 6월에서 1953년 7월까지이고, ‘조국해방전쟁시기의 조선음악’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모든 음악 정책과 활동이 전쟁 수행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또 대부분의 음악들이 전시음악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제4기는 1953년 7월부터 1961년 9월까지이고, ‘전후복구건설과 사회주의 기초건설시기의 조선음악’이라고 부르고 있다. 북한의 음악이 재정립된 시기로, 악기 개량이 시작되었고 창법과 발성법이 바뀌었으며, 모든 악기의 조율법이 서양식 12평균율로 통일이 되었다.


제5기는 1961년 9월부터 1966년 10월까지이고, ‘사회주의 건설시기의 조선음악(1)’로 명명하고 있다. 음악으로 천리마 기수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전형적 형상을 만들고 또 음악에서 ‘주체’를 세우고, 부르주아를 반대하여 투쟁하며, 군중음악예술을 강화하는데 초점이 모아졌다.


제6기는 1966년부터 1970년 11월까지이고, ‘사회주의 건설시기의 조선음악(2)’라고 부르고 있다. 이른바 음악에서도 ‘혁명’이 단행된 시기로, 모든 음악은 김일성의 주체적 문예사상과 노동당이 제시한 주체적 문예방침에 따르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북한의 음악은 ‘당의 유일사상 체제 확립과 온 사회의 혁명화, 노동계급화의 요구에 맞는 음악예술의 전면적 혁명화’라는 방침 아래에서 진행하게 되었다.











혁명가극 <피바다>의 한 장면

제7기는 1970년 이후부터 김일성 사망까지로, ‘사회주의 건설시기의 조선음악(3)’으로 명명하고 있다. 모든 음악 활동을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실현하도록 규정을 하였으며, 북한이 자랑하는 〈피바다〉를 비롯한 5대 혁명 가극이 만들어졌고, 전통악기의 개량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리고 가극·영화·무용 등에서 극적 줄거리를 음악적으로 이끌어 가는 일종의 합창형태인 ‘방창’ 제도가 생겼고, 음악무용종합공연에서 막이 없어지고 대신 흐름식으로 바뀌었다.











국제소년단야영소(화면반반주음악실)

제8기는 김정일 등장 이후 오늘날까지이며, 크게 전 시대에 만들어진 ‘주체음악론’을 계승·발전·구체화시킨 것을 주축으로 하면서 미비하나마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미비한 변화로는, 창작물의 중심 주제를 김일성 찬양과 인민들의 노동계급화 및 혁명화에서 김정일체제 보위의식 함양으로 옮긴 점, 김정일이 이끄는 북한체제가 ‘밝고 명랑한 사회’가 되야 한다면서 그 동안 금기시 되어 왔던 인민들의 생활감정이나 연애감정을 표현한 노래들이 등장하였다는 점, 전통음악의 발굴 및 원형보존에 관한 관심이 고조가 되었고 종래에는 부르주아음악이라고 배제되었던 궁중음악이나 정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시작되었다는 점, 문화정서사업의 일환으로 화면반주음악실(노래방)이 등장하였다는 점, 전자악기를 사용한 경음악과 대중가요가 새롭게 등장을 하여 유행을 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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