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에 주목 받는 화가
2000년대 들어와서 북한미술작품들이 남한의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소개되면서, 북한 작가들 중에서도 스타작가가 탄생되었다. 남한에서의 스타작가에 걸맞는 작품가격과 화려한 주목을 받았던 것은 아니지만, 남한에서 가장 선호되는 북한 작가로 정창모와 선우영을 꼽는 데 주저하는 미술인은 거의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정창모는 1931년 12월 16일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났다. 작가는 외할아버지 리광렬이 문인화가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집 안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6.25 전쟁 중 월북하여 1957년 평양미술대학에 입학, 조선화 학부를 졸업하였고, 이후 평양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만수대창작사하면서도 많은 후배들을 지도하였다. 1977년 2월에 공훈예술가가 되었고, 1989년에는 인민예술가칭호가 수여되었다.
정창모의 작품은, 북한 미술계가 몰골법이라는 이름으로 복권시켜낸, 전통 문인화의 다양한 준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현대화시켜냈다는 점에서, 김정일시대 미술의 특징을 대표한다 하겠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이 정창모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 가능하였던 것은, 그가 평양미술대학에서 월북작가 정종녀에게 배웠으며, 1965년이후 월북작가 이석호의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김일성시대 배우기 어려웠던 문인화의 여러 준법을 터득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는 점도 주요하였다고 판단된다.
특히 정창모에게 사사 받은 작가 선우영은, 정창모가 정치 ․ 경제 ․ 의학 ․ 예술 분야 등방대한 양의 독서를 통한 박식함뿐만 아니라 깊은 사색 또한 일상화되어 있는 작가임을 술회한 바 있다. 선우영의 증언에 따르면 정창모는, 방대한 양의 독서와 깊은 사색 후 일필휘지로 그려낸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한 정창모의 화면은, 전통미술의 형식뿐만 아니라 전통미술의 미학 및 제작태도와 제작과정이 응충된 속에서의 현대화를 시도하였다는 점이 주목되는 것이다.
선우영은 1946년 평양출생으로, 경공업대학에서 평양미술대학에 편입되어 공부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산업미술학부로 진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졸업 후에는 중앙미술창작사에서 유화를 그렸고, 이 곳에서 정종녀에게 조선화를 배우게 된다. 이를 계기로 이후 만수대창작사에서 조선화가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1989년 공훈예술가, 1992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특히 선우영은, 사실주의적 창작방법에 기초하여 풍경화 화면을 이룩해내면서도, 서양화처럼 대상을 면으로 파악하여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밀도 있게 그려낸다. 이를 통해 서양화의 산과도 다르고, 전통적인 산수화와도 다른 자신만의 개성적인 풍경화를 이룩해내었다. 특히 그는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여, 본질적 아름다움을 보다 강조하고, 불필요한 부분을 생략하면서 화면을 구축해낸다. 이는 밀도 있는 세화기법과 결합되어 개성적인 풍경화를 제작해내었다. 이를 통해 인물화보다 침체되어 있는 풍경화 장르의 중요성 및 발전 가능성을 부각시켜 냈다.
<필자 : 박계리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