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례화 되고 있는 <아리랑> 공연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은 2002년 4월 첫 선을 보였다. 평양시 모란봉구역 능라도에 있는 5월1일경기장에서 10만여 명의 출연으로 1시간 남짓 진행되는 초대형 공연이다. 〈아리랑〉은 사상 초유의 출연자 규모, 3개월여의 장기공연, 외부세계(주로 남한 국민)를 겨냥한 마케팅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주목을 받았다. 〈아리랑〉 공연이 집단주의 문화의 정수이고, 또 국가적 동원체계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의미의 공연예술로 볼 수 있을 것인지 많은 논란이 있지만, 북한을 대표하는 최고 수준의 창작가, 예술가들이 대거 참여하여 음악·무용·체조·교예 등을 배합한 새로운 형식의 공연예술로 창안해 냈다는 점에서 북한 내부에서 평가하는 의미는 각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리랑〉 공연의 실제 출연자는 몇 명이나 될까? 북한의 공식 홍보물에는 10만 명이 출연한다고 되어 있지만,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는 6~7만 명 정도라고 한다. 배경대(카드섹션)에 2만 여명, 그리고 운동장 출연자 4만여 명 정도이다. 각 장면마다 운동장에서 들어서는 출연자의 수는 대략 1,500명 내외이다. 다만 이는 순수하게 출연자의 수를 말하고, 만약 운동장을 빙 둘러 사각으로 막을 치고 있는 ‘막깃발’을 담당하는 기수나, 의상이나 소품 제작자, 조명이나 음향 등의 기술 스태프까지 더하면 〈아리랑〉 공연을 만들어 내는데 줄잡아 거의 10만 명 가까운 일손이 참여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하나의 공연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북한 사회가 아니고서는 그러한 공연의 기획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아리랑〉 공연의 구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아리랑〉 공연은 분절되어 있는 여러 장면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장면은 출연자도 다르고 주된 표현 장르도 다르다. 즉, 하나의 장면 내에서는 서로 호흡을 맞추는 게 필요하지만, 장면과 장면 사이는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긴밀한 훈련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각 장면별로 연습을 진행하여 충분히 익숙해지면, 마지막 단계에서 장면과 장면을 연결하는 ‘관통훈련’을 통해 등·퇴장 등 연결부분만 서로 맞추어 보면 된다.


2005년 가을, 3년 만에 〈아리랑〉 재공연이 있었다. 공연 내용과 형식이 2002년 공연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공연장소도 5월1일경기장으로 같았다. 출연자들도 배경대(카드섹션) 등 학생들이 담당하는 부분만 교체되었을 뿐 대부분의 출연자들은 2002년 공연과 거의 같았다. 크게 달라진 점은 2005년 〈아리랑〉 공연 때에는 8,000명 가까운 남한 관객이 직접 평양의 5월1일경기장을 방문하여 관람했다는 사실이다. 분단 이후 일반 국민이 평양에서 펼쳐진 공연을 관람하고, 시내 주요 시설과 문화유적을 탐방하는 패키지 관광 프로그램에 대규모로 참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볼 수 있다.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의 2007년 공연에서는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던 노무현 대통령 일행이 관람하여 다시 한 번 외부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2008년에도 〈아리랑〉 공연이 8월부터 10월까지 예정되어 있다. 북한 핵문제가 해결되고 남북관계가 풀리게 되면 〈아리랑〉 공연이 다시 한 번 남북화해협력의 장으로 기능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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