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흥리고분의 발견 >
1976년,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군 덕흥리에 있는 무학산 산기슭에서 관개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고구려 벽화고분 하나가 발견되었다. 이 고분의 문이 열리자, 당시 이를 지켜보던 세상의 눈길은 그야말로 탄성을 질렀다. 이 덕흥리고분의 발견은 1971년에 공주에서 발견한 무령왕릉의 역사적 발굴에 버금가는 대단히 중요한 고고학적 사건이었다. 사실 무령왕릉도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된 점을 생각하면, 이들 세상을 놀라게 한 이 두 고분은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 데에도 극적인 방법을 택한 셈이다.
 












< 덕흥리고분 외경 >
덕흥리고분은 수십장의 돌판으로 무덤방을 만들고 흙으로 봉토를 덮은 양식으로서, 고구려의 거의 대부분의 벽화고분은 이런 석실봉토분(돌방흙무덤) 양식이다. 덕흥리고분에는 무덤방이 2개가 만들어져 있는데, 각 벽면에는 회칠을 하고 그 위에 화려하고 솜씨가 뛰어난 벽화를 그려 사방의 벽과 천정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만 들어보아도 주인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행진하는 행렬도, 18태수하례도, 불교 공양도나 출행도 같은 주인공의 일상생활을 그린 벽화, 그리고 천장에는 여러 천상세계의 신과 별자리 그림이 가득하였다.


이 덕흥리고분이 특히 주목을 받은 이유는 이런 벽화도 벽화지만, 무엇보다 600여자에 이르는 묵서명, 즉 먹으로 쓴 글씨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판독이 가능한 글자는 560여 자 정도인데, 집안에 있는 유명한 광개토왕비를 제외하고는 고구려 역사에 관해서 가장 많은 문자 자료를 전하고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사실 사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고구려사 입장에서는 이 정도 문자 자료의 발견은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바로 무덤의 주인공, 즉 묻힌 사람의 경력을 보여주는 묘지명이다. 사실 수많은 고구려 고분 중에서 무덤 주인공을 알려 주는 자료가 남아있는 것은 이 덕흥리고분과 지금 황해도 안악군에 있는 안악 3호분, 이 두 고분밖에 없다. 더욱 묘지명에 의해 무덤의 축조 연대를 알 수 있어 고구려 벽화고분의 편년을 세울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 가치는 더욱 빛난다.
 












< 덕흥리고분 진 묘지명 >
이 덕흥리고분의 묘지명에 의하면 무덤 주인공의 성씨는 지워져서 알 수 없는데 2자로 된 복성이었고, 이름은 진(鎭)이었다. 출신지는 신도현 출신인데, 신도현이 속한 군의 이름 역시 지워져 보이지 않다. 이 때문에 주인공의 출신을 둘러싸고 고구려인이라는 주장과 중국인이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 있다. 우연히도 주인공의 출신을 알려주는 결정적 자료라고 할 수 있는 성씨와 출신 군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쉽다.


그런데 이 출신지가 왜 중요하냐 하면, 이 무덤주인공 진의 경력 때문이다. 진은 건위장군.용양장군.좌장군(당시 중국 품계로 정4품에서 종3품에 해당됨) 등 여러 장군직을 역임하였고 요동태수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동이교위 유주자사를 지내다가, 77세를 일기로 영락 18년(409년) 12월 25일에 죽어 여기에 묻힌 사람이다. 여기의 영락은 고구려 광개토왕때의 연호이므로 진은 광개토왕 때 활약한 인물이다. 그런데 유주의 치소는 지금의 중국 북경 부근이기 때문에, 만약 진이 고구려인이라고 한다면, 광개토왕대 고구려의 영토는 지금의 북경지방에까지 이르렀다는 결론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벽화고분의 발견은 당시 남북한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학계에서도 큰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 덕흥리고분 초상 >
 
<동수와 진 >
그런데 여러 자료를 면밀히 검토해보면, 주인공 진은 중국 출신임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진은 중국 출신이지만, 그의 무덤이 평양지역에 있다는 것은 언젠가 그가 고구려로 망명하였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유주 경영 여부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게된다. 아직 설명하지 못한 많은 의문들이 남아있지만, 여기서는 고구려로 망명한 진 등이 왜 이곳 평양에 묻히게 되었는지를 추적해보자.


덕흥리고분이 위치한 평양 일대는 과거 낙랑군이 설치되어 있던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고조선 토착주민 외에도 일찍부터 관리나 상인 등 중국인이 거주하면서 지배층으로 있었다. 낙랑군이 고구려에게 병합되었다고 하여 이들이 모두 중국 본토로 건너 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구려가 낙랑 지역을 차지한 이후에도, 요동 등 중국 동북방의 정세가 어지러웠기 때문에 이를 피해 한반도로 건너온 중국계 주민이 많았다. 그들 중 장무이(張撫夷), 동수(冬壽), 동리 등 인물이 자신의 흔적을 평양과 주변 일대에 남겼다.
 












< 장무이 명전 >
1914년 황해도 봉산군에서 비교적 큰 규모의 벽돌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벽돌에 새겨진 글자를 통해 무덤의 주인공이 무이교위(撫夷校尉)와 대방태수를 지낸 장 아무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중국 요서의 어양군(漁陽郡) 출신으로 언제 이 일대에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무덤의 축조 연대인 무신년(戊申年)은 348년(고국원왕 18년)으로 추정되었다. 또 1932년에 平壤驛 구내 공사 중 발견된 벽돌무덤에는 요동.한.현도태수를 지낸 동리라는 인물이 묻혀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는 그 성씨로 미루어 아래의 동수(冬壽)와 같은 집단으로 생각되며, 353년에 사망하였으니, 동수와 같은 시기에 평양지역에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 동리 명전 >
1950년대 발견 조사된 안악 3호분은 고구려 벽화고분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벽화가 다양하며 화려한 것으로 이름이 높지만, 무덤 주인공의 실체와 관련해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논란의 핵심은 무덤의 한쪽 벽면에 쓰여 있는 동수의 묘지명을 무덤주인공의 것으로 볼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논란이 어찌되었건 동수는 326년(미천왕 27년)에 요동의 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로, 묘지명에 의하면 낙랑.대방.현도 태수 등을 지내고 357년(고국원왕 27년)에 죽어 묻혔다.
즉 평양 일대에 묻힌 동수.동리.장무이 및 유주자사 진 등은 중국 출신들로 고구려로 망명하여 낙랑.대방군이 고구려에 장악된 이후에 이 지역에서 활동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 안악 3호분 동수 묵서명 >
그러면 그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사실 미천왕 때 고구려는 낙랑군을 축출하고 한반도 서북 일대를 차지하였지만, 이 지역에 대한 지배는 그리 간단치 않았다. 이들 낙랑지역 주민들은 출신지나 혹은 중국문화의 세례를 오랫동안 받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하였다. 특히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땅이 되었다고 하여 쉽사리 순종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고구려의 입장에서도 새로 정복한 이 지역의 주민을 무조건 강압적으로 다스릴 형편은 아니었다. 이들은 갖고 있던 문화적 능력 등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낙랑지역은 좀 특수한 방식으로 다스렸던 것 같다. 그것이 중국계 망명인들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이들을 서서히 통제 흡수해 가는 방식이었다. 바로 지금까지 살펴본 동수.동리.장무이 및 유주자사 진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물론 고구려가 낙랑지역을 계속 이렇게 특수한 형태로 놔두지는 않았다. 광개토왕대나 늦어도 장수왕의 평양천도 이전에는 고구려의 직접적인 지배체제 안으로 편입하였다. 여기에 평양천도가 갖는 또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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