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장수왕이 즉위하고 15년 뒤인 427년에 수도를 국내에서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지금도 고구려의 수도였던 중국의 집안에 가면 국내성과 환도성을 비롯하여 1만 2천여 기의 고분들이 도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 400년간 도읍지로서의 영화를 전해주고 있다. 사실 조상과 부모들이 살았던 곳,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키워왔던 곳을 떠나, 아무래도 낯설고 물설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천도를 한다는 것은 단지 왕궁을 옮기고 지배층의 거주지를 옮기는 문제만이 아니라, 물자유통과 방위체계 등 여러 사회적 시스템을 새로이 재편하는 커다란 변화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상당한 정치적 변화를 동반하지 않고는 천도가 단행되기 어렵다.
그러면 고구려는 왜 이때 평양으로 천도할 마음을 먹었을까? 또 천도를 하면서 요동의 어디쯤에 기세좋게 자리잡지 않고 왜 한반도의 평양에 주목을 하였을까?
 
<왜 평양인가?>
평양이 갖는 수도로서의 장점은 국내지역과 비교하면 금방 알 수 있다.
첫째, 평양지역은 대동강유역과 황해도지역의 비옥하고 너른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뛰어난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다. 풍부한 물산을 자랑하는 이곳은 산간지대에서 수백년을 살아온 고구려인들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었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만큼, 고구려의 지배층들은 그 위상에 걸맞는 왕도를 건설하고 화려한 영화를 누리려는 욕망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평양은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곳이었다.
 












< 안학궁터 전경 >
둘째, 내륙 깊숙이 있는 국내성과는 달리 평양지역은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다. 고구려가 요동이나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진출할 때에 거점과 배후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었다. 또한 이 지역이 낙랑 . 대방군 이래 한반도 남부와 중국을 연결하는 해상교통로의 요충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바닷길로 국제무대에 진출할 수 있는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즉 평양의 지리적 조건은 폐쇄적인 국내성과는 달리, 훨씬 개방성과 국제성을 갖고 있다고 보겠다.


셋째, 고구려가 왜 수도의 입지요건으로서 평양이 갖는 개방성을 고려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고국원왕 이후 겪게된 고구려의 새로운 경험과 관련이 있으리라 본다. 초기에 기세등등하게 성장을 거듭해온 고구려는 고국원왕대에 요동의 전연(前燕) 및 한반도의 백제와의 진검 승부에서 거듭 패배의 쓴맛을 보았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점도 패인이었다. 이후 고구려는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을 키워나갔으며, 광개토왕대 화려한 정복활동의 배경에는 전연.백제.신라.왜 등의 동향을 파악하고 이에 적절히 대응해간 탁월한 국제적 감각이 뒷받침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매김을 뚜렷이 하려고 했고, 수도의 입지도 국제무대에 용이하게 진출할 수 있는 곳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이점에서 보면 평양만한 후보지도 달리 없었다.


네째, 평양은 고조선 이래의 역사적 전통과 낙랑군 이후 중국문화의 세례를 받은 우수한 문화전통을 갖고 있는 곳이란 점도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이점이었다. 과거 낙랑군 이래 평양 일대에서 자리잡고 있는 세력집단들은 오랫동안 중국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당장 요긴하게 활용될 수 있는 풍부한 인적 자원들이었다. 특히 당시 고구려는 영역 팽창이 크게 이루어지면서 확대된 중앙관료체제와 영역관리를 위한 인적 충원이 절실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평양일대의 토착세력들을 새로운 관료집단으로 편제하는 것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실제로 장수왕대에는 이들 평양일대 출신 인물들이 중국과의 외교활동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다섯째, 천도지로서 평양의 입지와 관련지어 고구려의 발전 방향도 생각해보자. 그동안 북위 등의 등장으로 서쪽 진출이 불가능해지자, 남진이 유리한 평양으로 천도하게 되었다는 견해가 유력하였다. 그러나 4세기까지 고구려가 서진을 고집한 것도 아니었으며, 5세기 들어 남진에만 주력한 것도 아니었다. 남진이냐 서진이냐의 방향의 문제가 아니라, 어떠한 방식으로 영역화를 이루었느냐 하는 내용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평양천도로 남진정책이 유리해진 것은 틀림없지만, 남진정책의 추구를 천도의 동기로 이해하기는 곤란하다.
 






< 안학궁 복원도 >
 
<평양천도 이후 >
평양천도가 이루어진 427년, 이 해는 고구려사의 획을 긋는 중요한 해였을 뿐만 아니라, 장차 삼국 전체의 역사에 커다란 파장이 예고되는 해이기도 하였다. 장수왕대의 남진정책은 475년에 백제의 한성 함락과 개로왕의 전사, 그리고 뒤이은 백제의 웅진 천도를 결과하였다. 이후 백제는 웅진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절치부심 설욕의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구려의 남하에 위기를 느낀 신라 역시 이제까지의 친고구려적 입장을 버리고 백제와 손을 잡았지만, 결국 고구려에 굴복하고 신라왕은 고구려왕의 신료로서의 수모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중원고구려비는 바로 그 때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평양천도가 가져온 한반도 정세의 지형 변화의 모습이다.


그러나 평양천도가 고구려사에 의미하는 진정한 모습은 이것이 아니다. 5세기 이후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데에는 수도로서 평양이 갖는 지리적 개방성과 국제성이 한 몫을 하였다고 보인다. 당대 고구려는 북위.남조.유연과 더불어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유지해 가는 중심축의 하나였다. 또 고구려적 ‘천하’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 평양은 새로운 문화 변동의 구심점이기도 하였다. 평양천도 이후 고구려의 문화적 성격이 그 이전과는 상당한 변화를 보인다. 평양일대에 흩어져 있는 고분벽화가 그러한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본래의 전통적 문화 기반 위에 외래의 다양한 문화요소를 융합하여 독자의 고구려 문화를 창출하고 있다.


평양천도는 당시 고구려의 사회변화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국가발전 방향을 새로이 모색한 개혁의 상징적 표현이었다. 평양천도가 고구려의 새로운 변신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중요한 역사적 교훈이 되고 있다.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