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은 고조선 . 고구려의 수도였고, 고려와 조선에서는 서북방의 중진이었다. 외국의 침략군이 침공할 적에는 평양을 목표로 하거나 혹은 평양은 반드시 거쳐야만 할 곳이었다. 그런 만큼 평양에서는 국운을 건 큰 싸움이 계속 이어졌다.
 
<국운을 건 전쟁의 파노라마>
처음 평양에서 벌어진 큰 전쟁은 고조선과 한의 대군과의 전쟁일 것이다. 기원전 109년, 한은 고조선과 흉노와의 연결 가능성을 차단하고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의도를 갖고 대군을 고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중국대륙의 강력한 통일 제국인 한도 의외로 고조선의 저항에 막혀, 1년여 간 치열한 격전을 치러야 하였다. 고조선은 초기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갔으나, 이후 한의 분열책에 고조선의 지배층이 분열되면서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평양에서 벌어진 첫 전쟁은 한 국가의 운명을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고조선의 멸망 이후 평양지역에는 낙랑군이 설치되어 중국의 지배력이 미쳤다. 그러나 4세기 초반 그 힘이 약화되면서 이 지역을 둘러싼 고구려와 백제의 경쟁이 치열하였다. 371년 백제 근초고왕의 태자 근구수왕이 예성강 전투에서 패주하는 고구려군을 쫓아 평양성까지 진격하면서 이곳에서 한바탕 격전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유시에 맞아 숨지면서, 이후 양국은 돌이킬 수 없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평양에서의 두 번째 전쟁은 한 왕의 운명을 거두면서 역사의 물줄기를 급격히 틀어놓았다.


고구려의 강성은 자연히 수도 평양의 태평성대를 가져왔다. 전쟁의 위협은 커녕 동북아시아의 국제도시로서 풍요와 번영을 구가하였다. 그러나 7세기에 중원의 격랑은 수(隋)와 당(唐)이라는 통일제국을 낳았고, 이들은 다시금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동방을 넘보는 수순을 밟기 시작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하려는 중원세력의 최종 목표는 수도 평양이었다. 그러기에 수의 침략시에도, 당의 침략시에도 평양성은 한바탕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 평양성 복원도 >
612년, 수양제는 1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수의 주력군은 요동성(遼東城)에서 가로막혔으며, 수의 해군이 단독으로 평양성 공격에 나섰다가 참패하였다. 30만 5천 명의 별동대는 을지문덕의 계략에 빠져 평양성까지 유인되어왔다가 감히 싸움 한번 못해보고 되돌아가다가 살수에서 대패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된 수양제의 무리한 고구려정벌은 결국 수왕조의 멸망으로까지 이어졌다. 세 번째 평양에서의 전쟁은 평양을 공격한 왕조를 멸망시키는 의외의 결과를 연출하였다.


668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견고하게 저항하던 평양성도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오랜 전쟁에 지치기도 하였지만, 고구려의 멸망은 바로 지배층의 내분 때문이었다. 연개소문의 사망이후 그의 아들들을 둘러싼 내부분열은 고구려의 저항력을 완전히 무기력화시켰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높은 성벽이 아니라, 단결된 인심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평양에서의 네 번째 전쟁은 바로 평양 그 자신의 몰락이었다. 이로써 또 하나의 왕조가 역사에서 지워졌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폐허로 남아있던 평양은 고려시대에 서경으로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고려도 적지 않은 외침을 받았으나, 그래도 서경 이북에서 적군을 저지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기에 서경이 전쟁에 휘말리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게다가 국가의 운명을 건 큰 전쟁이 평양을 무대로 전개되지는 않았다. 평양으로서는 행운이었는지, 아니면 역사의 무대에서 살짝 비켜선 결과였는지…
 
<임진왜란의 평양성 전투 >
오랜만에 국운을 건 한차례 전쟁이 평양에서 벌어졌다. 임진왜란 때였다. 1592년(선조 25) 파죽지세로 서울을 함락시킨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선봉은 6월 11일 싸움한번 하지 않고 평양성을 손에 넣었다. 6월 15일, 다급한 조선의 원병 요청에 따라 명군이 최초로 압록강을 건너온 것은 조승훈(祖承訓) 거느린 3,500명뿐이었다. 7월 17일 밤, 큰 소리를 치던 조승훈은 적의 계략에 빠져 평양성에 입성하였다가 매복한 적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겨우 잔병을 수습하여 퇴각하였다.
 








< 평양성 전투도(고려대 박물관) >
8월 1일, 명의 군대를 격퇴하고도 추격하지 않는 왜군의 동태를 살핀 조선측은 2만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싸움도 일진일퇴만 거듭하였을 뿐 평양성을 공략하지 못하고 전선은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한편 첫 전투에서 패배한 명나라 조정은 일본군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총 등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제압하기 위해 절강 등지의 화포부대를 동원하였다. 그리하여 12월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4만 8천명이 다시 들어왔다.


해가 바뀌어 1593년 1월 6일. 드디어 명나라 군사 4만3,000명과 도원수 김명원이 이끄는 조선의 관군 및 다수의 의병과 승병을 합친 도합 6만여 병력으로 두 나라가 연합 작전을 펴서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싸움은 3일간 혈전을 거듭하여 4일째인 1월 9일, 적은 1만 명의 전사자를 버려 두고 퇴각하였다. 7개월 만에 평양성을 다시 되찾은 것이다. 이 승리는 왜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으며, 평양을 근거지로 다시 난국을 수습할 여유를 조선의 조정에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승리에 취한 이여송이 방심한 채 퇴각하는 일본군을 쫓아 서울로 향하다가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고 다시 평양으로 물러났다.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곧 끝날 것 같던 전쟁은 언제 끝이 날지 다시 아득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조정은 이여송을 재조지은(再造之恩), 즉 다 망한 나라를 다시 살려낸 은혜를 베푼 인물로 추앙했다. 평양성 전투 승리의 소식이 전해지자 이여송의 공적을 기리는 송덕비를 세우고, 또 평양에 생사당(生祠堂) 즉 살아 있는 인물을 위한 사당인 무열사(武烈祠)를 세워 여송을 비롯한 명나라 장수 6명의 화상을 걸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낸다는 둥 부산을 떨었다. 이 평양성 전투는 정작 국운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남의 손을 빌린 조선 조정이 남긴 씁쓸한 교훈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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