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2년 조선 순조 22년(1822)에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던 박내겸(朴來謙)은『서수록(西繡錄)』을 남겼다. 여기서 ‘서(西)’는 평안도를, ‘수(繡)’는 암행어사를 뜻하는 것으로 즉 평안도일대를 둘러본 암행 일기란 뜻이다.


박내겸의 암행 기행은 1822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이루어진다. 그는 윤3월 16일에 어명을 받아 21일에 한양에서 길을 떠나 개성-금천-평산-곡산을 거쳐 26일 평안도 안덕에 들어가 암행어사로서의 업무를 시작한다. 이어 성천-강동-중화를 지나 4월 4일에 평양에 들어가, 어사로서의 임무와 더불어 평양 일대를 두루 둘러본다. 4월 11일에 다시 길을 떠나 북쪽으로 순천- 안주 등지를 두루 살피고, 5월 초에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임무를 정리하며 평양에 머문다. 5월 13일부터는 다시 각지에서 출도하고, 6월 말에서 7월 초에 평양에 출도하여 머물다가 7월 말에 귀경하여, 7월 28일에 임금 앞에 나아가 임무를 마쳤음을 아뢰고 보고서를 올렸다. 그는 별도로 기행일지 “서수록”을 남겼는데, 이 기행 일기에서 평양지역에 관한 기사를 추려 당시 생생한 평양의 풍광과 인심을 살펴보자.
 








< 연광정 >
<4월 4일>
박내겸이 장림으로 바삐 나가 멀리 평양성을 바라보니, 누대와 성첩(城堞)이 큰 강 절벽 위에 맑게 빛나서 마음과 눈을 시원하게 틔워 주었다. 강을 건너는데 뱃사람 역시 사람들을 조사하는 자라서 지나온 길을 따져 물었다. 적당히 대답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이윽고 각자 흩어져 성으로 들어간 후 여관 하나를 찾아 묵었다. 감사는 김이교라는 안동 김씨 세도가의 인물이다. 조금 쉰 뒤에 연광정(練光亭)에 올라갔다. 하늘을 찌르는 누각, 어지럽게 정박하여 있는 나루의 커다란 배들, 땅끝까지 가득한 동네, 강을 따라 계속되는 숲… 빼어난 경치에 이리저리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무어라 이름붙일 수 없는 형상이 진실로 평생토록 잊지 못할 장관이었다. (하략)


* 평양의 경치는 옛부터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피난지에서 돌아오는 도중 “평양을 한번 돌아보고자 한다. 이때 안보면 언제 다시 오겠는가? 한바퀴 돌면서 방어시설 등을 보려고 하는 것이니, 유람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말아 달라” 고 신하들에게 사정을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선조는 전쟁 초기에 도망갈 때도 평양에 한참 머물렀는데 그래도 그때는 구경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 부벽루 >
<4월 5일>
박내겸은 어사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도 다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차근차근 여러 경치를 보았다. 식사 후에 작은 배 하나를 세내어 부벽루(浮碧樓)에 올라갔다. 이어서 영명사(永明寺)로 숙소를 옮겼는데, 여관은 분주하고 떠들썩하여 남모르게 조사한 내용을 일기로 정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절의 중들도 모두 승군이고 유람객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활쏘기 모임으로 어수선하였다. 여기도 고요하고 적막하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여관집보다는 나았기에 그대로 유숙하였다.
 






<4월 6일>
박내겸이 아침을 먹는데 어떤 사람이 머리를 어지럽히고 옷을 벗어 맨살을 드러냈으며 해어진 작업복을 등에 걸쳤는데 그나마 가렸다 벗었다 하며 앞에 와서 밥을 구걸하였다. 그리하여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물어보니 절의 중이 대답하기를, “이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본래는 능라도(凌羅島) 향인(鄕人)의 아들로 부모와 처자가 있습니다. 어려서는 시와 문장에 능하고 경학을 공부하였는데, 어려움 속에서 학문에 힘쓰다가 괴로움이 지나친 까닭에 문득 마음의 병이 일어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박내겸이 그 말을 듣고 불러다 앞에 앉혀 함께 식사를 하는데 반은 먹고 반은 흘렸다. 주역을 외게 하니 주역을 외고, 시경을 외우라면 시경을 외었다. 또 시를 짓게 하니 한두 구절을 읊조렸다. 모습은 비록 까맣게 때에 절어 차마 볼 수가 없었지만, 그가 본래 단정하고 아취있는 선비였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사는 마음이 상하고 불쌍한 생각이 일어 차마 볼 수가 없었다.(중략)


* 당시 평안도와 함경도의 인사들은 중앙에서 극심한 차별을 받고 있었다. 이 광인의 개인적인 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본래 단정하고 아취있던 평양의 선비가 미친 사람이 된 데는 부당한 차별 속에 울화를 못 이겨 병이 들어갔던 것은 아닐까.


(전략) 주지승이 병이 깊었으므로, 중성(中城)의 별감(別監) 유희필(劉希弼) 집으로 숙소를 옮겼다. 어쨌거나 사람이 없고 조용하여 좋았다. 밤에 등을 걸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니 집주인이 평양의 누대와 강산이 빼어나고 기세높은 협객들의 풍류가 번성함을 장황하게 이야기하였다. “평양부는 배와 수레가 통하고 화물이 모이는 곳이라서 식리 사업으로 살아가며 부를 쌓기가 매우 쉽지만, 어지럽도록 화려하고 멋대로 놀아나서 엎어져 망하는 것 또한 쉽습니다. 민간 유행하는 말에 ‘부자의 손자가 가장 불쌍하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이익을 몰아 부를 쌓으면 아들이 방탕하게 놀러다니며 남김없이 써버리고 손자는 굴러다니는 거지가 되어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 사실 평안도 주민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비약적으로 상업을 발전시켰다. 18세기 말에 정조가 혜경궁 홍씨를 위한 잔치를 베풀 때에는 서울에서 구하지 못하는 비단들을 평양과 안주의 저자에서 구입해 들일 정도였다. 평안도는 그와 같이 부를 쌓아나가 18세기 이후로는 전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이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국가에서 재정이 모자랄 때는 거의 예외없이 평안도에서 가져다 썼다. 또한 전통적인 지배체제가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능력을 바탕으로 한 경쟁이 자유로운 곳이었다.
 
<4월 7일>
식사 후에 다른 사람들과 각처로 흩어져 갔다. 박내겸이 염탐을 한 후에 다시 대동문 누각에 오르니 감사가 자산 수령과 더불어 연광정에 와서 노는 것이 멀리 보였다. 감사의 아들 김군실(金君實)이 그 서삼촌 면여(勉汝)와 더불어 배를 타고 골짜기를 향해 거슬러 올라갔다. 노래하는 기생, 술과 안주가 부러워할 만했지만 어사로서는 가까이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감영 소속의 관노가 몽둥이를 들고 와서 구경하는 사람들을 쫓으면서, 감사가 노는 연광정에 가까이 가는 것을 막았다. 여러 차례 곤경을 겪으며 누각을 내려왔다.(하략)
 









< 기자묘의 위치(해동지도) >
<4월 10일>
박내겸은 칠성문(七星門)으로 나갔다. 여기저기를 거쳐 기자묘(箕子墓)에 올라갔다. 그는 ‘큰 성인 기자가 우리 동쪽 나라에 있었기에 옛날에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이루어졌고, 여덟 조목의 법을 세워 백성을 가르친 것은 오늘날까지도 의지할 힘이 되는도다’ 하고 되뇌면서 정성된 마음으로 열심히 돌아보았다. 기자묘는 낮은 담을 둘러치고 석물(石物)이 있었으나 생각보다 옹색해 보였다. 의심이 드는 부분도 있었다. 무덤의 형태는 모서리가 넷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옛날 제도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제사 준비를 하는 정자각이 너무 가깝고 돌계단 앞도 심히 황량하였지만, 구역을 넓히거나 키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박내겸은 다시 ‘무릇 우리 동쪽 나라에서 군신과 부자의 윤리가 있음을 아는 것은 모두 성인 기자가 남기신 가르침인데, 높이고 보답하는 법식이 마음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슬픈 일이다’ 하며 애석해 하였다.


* 조선시대 유학자에게 기자는 이 땅의 문명교화를 가져다준 인물이다. 그들에게 평양에서 기자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이 당시 평양의 기자묘가 퇴락한 상태에 있었던 것은 이미 이러한 인식이 점차 무기력해 갔음을 시사한다.
 









< 능라도(평양성전도) >
<5월 9일>
식사 후에 강머리에 나가 국령이 막 평양을 떠나가는 것을 보았다. 피리와 북, 돛과 돛대며 위엄있는 의식이 매우 요란하였다. 국령은 그림배 위에 단정히 앉았는데 그를 모시던 경란(鏡鸞)이라는 기생이 곁에 서서 애틋한 미련에 이별하지 못하였다. 국령은 손을 저어 들어가게 하였지만 경란은 더욱 말도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하여 울기만 하니 눈물이 비처럼 쏟아질 뿐이었다. 배가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 국령 또한 떨치고 떠나지 못하더니, 마침내 함께 타게 하여 배를 출발시켰다. 이별의 시간을 조금 미룬 것일 것이다. 박내겸이 보기에 웃음이 터져나오는 일이었다. 주위에 둘러선 아전이며 백성들은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았을까?
 









< 대동관(평양성전도) >
<5월 12일>
박내겸은 연광정에 갔다. 강을 건너다보니 안장을 갖춘 말이 구름과 같고 쌍피리 소리가 밝게 울리는데, 그쪽에서 급하게 뱃사공을 부르니 사공이 관청 배를 가지고 가서 건네주었다. 평양 외성 사람으로 새로 급제한 전윤담(全允淡)의 빛나는 귀향 행차였다. 강을 건너더니 곧바로 내성의 넓게 트인 큰길로 접어들어 지나갔다.


* 원래 문과 합격자 발표가 난 후 급제자가 벌이는 잔치는 호사스러운 것이었지만, 부유한 평안도의 인물들이 문과에 급제한 후 대동강에서 벌이는 잔치는 일찍부터 조정에까지 널리 알려질 정도로 특히 요란하였다.
 
<7월 10일>
평안도의 으뜸가는 선비라고 칭해지는 선우협을 모신 인현서원(仁賢書院)과, 을지문덕을 모신 충무사(忠武祠)에 가서 참배했다. 점심에 한사정(閑似亭)에서 점심을 먹고 정전(井田)과 기자궁과 기정(箕井)을 돌아본 후 저녁에 돌아왔다.

* 여기서 기자가 정전제를 실시하였다는 자취는 사실은 고구려시대의 시가지 유적이다. 실제로 조선시대 평양 지도들을 보면 서쪽 내성 밖으로 반듯반듯하게 구획된 모양을 담고 있다.

 









< 기자 정전제의 흔적으로 알려진 고구려 도시구역(평양성도) >
<7월 11일>
박내겸은 감사와 함께 배를 타고 부벽루로 거슬로 올라가 하루 종일 유쾌하게 놀았다. 밤에 배로 내려오는데 구름 때문에 그늘이 져서 달을 즐길 수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 『서수록(西繡錄)』은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 일기를 토대로 한림대학교 오수창 교수는 평안도 역사 여행을 구성하였습니다. 본 글은 오교수의 글을 발췌 인용하였습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오수창 교수의 홈페이지를 참고하십시오
오수창 : http//www.hallym.ac.kr/~cha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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