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개혁법령을 환영하는 농민들
일본은 한반도를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만들었고, 2차대전중에는 전쟁을 위한 식량공급을 강요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의 대부분의 농민들은 자기의 땅이 없는 소작농이 되어 가난과 식량부족에 시달려야 했으며, 일부 사람들은 농촌을 떠나 먹고 살길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농촌 실정으로 인하여 농민의 73.8%가 전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거나 약간의 토지만을 소유한 처지에 있었다. 이들은 평균 50-60%에 달하는 소작료를 부담하였으며, 각종 잡세와 무보수의 노동 등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또 해방된 해인 1945년에는 수확의 감소와 약 10만명에 달하는 소련군의 주둔으로 북한 지역의 식량난이 가중되어 반수 이상의 농가들이 기아 또는 반기아 상태에 빠져있었다.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북한지역 토지의 11% 가량이 소유자가 없게 되었고, 지주계급을 지지해주던 정치세력도 소멸하였다. 가난한 농민들은 토지를 분배받기를 원했으며, 공산주의자들과 일제하 농민운동세력들이 소작료 3·7제와 토지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45년 추수기를 맞아서도, 농촌에서는 소작료 3·7제(지주 30%, 소작인 70%)도 실시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농민조합과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조공분국), 좌익이 주도하는 인민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소작료 3·7제를 추진해갔고, 소작농민들은 점차 이에 호응하면서 토지분배를 요구해갔다. 처음에는 소작료 3·7제 실시를 주저하던 소작농민들도 점차 대담하게 시위에 나섰고, 조공분국과 인민위원회의 지원으로 지주들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결국 소작료 3·7제를 요구하는 투쟁과정에서 소작 농민과 공산주의 세력들은 일치감을 확보하였으며,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특히 1945년 12월 말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대한 찬탁과 반탁 대립이 벌어지면서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주의세력들이 정치적인 타격을 입었고, 조공분국의 주도세력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들은 북한지역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이를 기반으로 통일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워 나갔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에서는 1946년 2월에 농민들의 요구에 따르는 방향으로 토지문제를 정리할 것을 결정하였고, 북조선농민연맹에서도 토지개혁을 위한 법안을 준비하였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3월 5일에 ‘북조선토지개혁법령’을 발표하여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토지개혁의 중요한 원칙은 모든 소작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무상으로 토지가 적거나 없는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토지개혁으로 북한의 가난한 농민들은 평균 1.29정보(논 0.39정보, 밭 0.9정보)의 경작지를 갖게 되었으며, 채무가 면제되었으며, 각종 농기구 등도 분배받았다. 지주들은 토지를 몰수당하고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도록 강요당했으며, 일부 지주들은 토지개혁에 불만을 가지고 월남하였다. 토지개혁으로 분배받은 토지에 대해서는 개인의 소유권을 부여하였지만, 매매나 저당은 금지되었다.



토지개혁의 집행과정에는 인민위원회, 노동조합 등 각종 조직이 총동원되었으며, 농민동맹에 속해있던 농촌자위대가 무력으로써 활용되었다. 토지를 몰수하고 분배하는 역할은 빈농과 고농으로 조직된 11,500여 개의 농촌위원회가 수행하였다. 이들 농촌위원회에 참여하였던 빈농들은 이후 공산당에 입당하고 정권기관에도 참여하여 북한정권의 지지기반이 되었다.



토지개혁으로 빈농들의 생활은 개선되었지만, 농업현물세가 25%에 달하게 됨에 따라 토지를 분배받지 않은 자작농들의 부담은 오히려 증가하였고, 실질적으로는 30%에 가까운 현물세가 징수됨으로 인하여 농민들이 불만을 갖기도 하였다. 북한의 토지개혁의 단순히 빈농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는데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는 북한 사회의 계급 질서를 뒤집은 사건이었으며, 남북한 사회의 갈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필자 : 이주철>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