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식민지에서 분단으로 이어진 해방은 남북한에 각기 다른 정치체제를 성립시켰다. 특히 북한에서는 일제하에서 성장하던 자본주의체제가 사회주의체제로 전환하는 결과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해외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세력들을 중심으로 정치권력이 장악되면서, 초기의 북한정권은 내부의 각 세력이 가진 기반과 정책노선에 따라 ‘노동조합’의 정책에 대해서도 갈등이 있었다.



국가와 노동조합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현실 사회주의국가’에서의 인민과 국가의 관계를 보여주는 압축적인 단면이다. 노동조합 논쟁은 이미 1920년대 초에 소련에서 이루어졌었는데, 소련에서는 제10차 당대회(1921년 3월)에서 노조의 제한적인 독립성, 공산당 독재와 국가관리 및 기업장 단독 책임경영제를 공식 표결처리하였다. 이로써 노동조합은 기능이 현저히 약화되었고, 스탈린은 1933년에 노동성을 폐지하고 이를 전소련노동조합중앙평의회와 합체하여 노동조합을 준국가기관화 했다.



이와 유사한 논쟁이 1947년 북한에서도 오기섭과 북한정권 주도세력 사이에 벌어졌다. 1946년 5월에 북조선노동총동맹이 북조선직업동맹으로 개편되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직업(총)동맹의 핵심 역할을 노동조건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국가기관과 협의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중요산업을 국가가 장악한 상태에서 노동조건의 협의는 국가기관과의 협의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직업동맹이 노동조건에 대하여 국가기관의 협의 대상으로 위치 지워진 점은 북조선로동당과 국가기구의 하부조직으로 변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조합(직업동맹)의 성격변화는 국내의 노동운동 세력에 기반을 두었던 국내파 공산주의자들과 정권 주도세력 사이에 마찰을 불러 일으켰다. 1947년 초에 북조선인민위원회 노동국장 오기섭은 “직업동맹은 과거나 현재를 불구하고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투쟁하는 노동자의 집합체”라며, “직업동맹은 노동법령의 시행을 방조하며 협력은 할지언정 그의 집행기관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오기섭은 “생산수단이 전부 국가의 수중에 있는 소련의 방식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이로 인하여 오기섭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상무위원회에서 트로츠키주의적 이론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논쟁이 거듭되면서 오기섭은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 회의(1947년 3월 15일)에서 북조선 노동자의 투쟁대상을 마치 국유화된 산업경제기관에 있는 것처럼 주장하고 선동했다고 비판받았다.



이 회의의 결론에서 김일성은 오기섭이 노동자가 인민정권을 상대로 투쟁하도록 하는 주장이라고 비난했고, 당과 직업동맹에서는 오기섭을 비판하는 결정을 채택하고 하급단체에 전달하였다.

오기섭의 직업동맹에 대한 해석으로 인한 논란의 과정은 직업동맹의 독자성을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의미와 더불어 권력다툼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자의 이익을 요구하는 노동조합세력,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지지기반을 유지하고자 했던 국내파 공산주의자와 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공업 성장을 먼저 실현하려는 정권 주도세력간의 갈등이었던 것이다. 이 논쟁은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에 대한 이해의 불일치가 한 원인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논쟁의 과정은 북조선로동당이 사회단체의 독자성을 부정하고 외곽단체의 성격을 강화하는 과정이었다. 이 시점에서 투쟁적이고 노동자의 이익을 주장하는 노동자보다는 순종적이고 노동규율에 성실한 노동자가 바람직한 노동자 상으로 제시되었고, 이후 북한 노동자계급의 수동적 성격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노동조합의 성격이 변화하게 된 것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1930년대 말에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조직을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점에도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필자 : 이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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