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 관부의 배치 추정도> |
왕권 사회에서 정치의 기본 무대는 궁궐일 수밖에 없다. 고려도 역시 수많은 관서들을 운용하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중앙 관서들은 수도 개경에 있었다. 조선 시대 한양에는 육조거리라 불리는(지금의 서울 세종로) 관아 밀집 지역이 있는 한편, 다른 관부들은 도성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개경은 어떠하였는가? 개경에도 역시 한양처럼 관아 밀집 지역이 있는 한편 곳곳에 관아들이 산재해 있는 절충적인 형태였다.
전근대 시기 도성 제도에서는 관아의 위치를 궁궐의 남쪽으로 규정하고 있다. 조선 한양의 경우에는 육조거리가 궁궐인 경복궁 앞에 위치함으로써 이 이념에 부합하고 있다. 그러나 개경의 경우에는 조선의 육조거리에 해당하는 관도가 본궐의 동쪽에 있다. 관아가 위치했던 관도는 본궐의 정문인 승평문으로부터 황성의 동문인 광화문을 지나 십자가에 이르는 도로였다.
관부들의 위치를 살펴보면, 승평문 밖 광화문에 이르는 곳에는 재상급들이 모여 일을 논의했던 상서성(尙書省), 추밀원, 중서성, 문하성 등 핵심 중앙 부서들이 있었다. 이중에서도 가장 모습이 으뜸이었던 관서는 상서성이었다. 정면의 대문을 지나 들어가면 중앙 3칸의 당(堂) 좌우로 10여 칸의 행랑이 열지어 있어 그 건물 규모가 가장 컸다. 북쪽 길가에는 상서호부, 공부(工部), 고공, 대악국, 양온국 등이 열지어 있었는데, 모두 문을 길가로 내고 각각 관부 이름을 현판으로 걸고 있었다. 남쪽 길가는 또 어떠했는가. 병부, 형부, 이부의 세 관사가 길을 향해 열지어 있었고, 그 동남쪽으로는 주전감(鑄錢監)ㆍ장작감 등의 부서들이 있었다. 이 근처에는 감옥도 있었다. 형부 맞은 편에 바로 감옥이 있었는데, 원형으로 높은 담장이 솟아 있는 건물이었다. 가벼운 죄인은 형부로 보내고 중죄인이나 도둑은 감옥으로 보냈다고 한다.
또한 시장 관련 일을 맡았던 가구소와 경시사 같은 기관은 시장 거리였던 십자가에 동서로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무인정권기 이후 핵심 정치 기관이었던 도병마사의 경우, 고려가 멸망할 무렵까지도 독자 건물을 갖지 못하였다가 공양왕대에야 건물을 갖게 되었다. 원간섭기를 거치며 격하된 이름인 ‘도평의사사’의 건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