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묘 추정도> |
<고려 태묘와 사직의 역사>
중국에서는 고대 국가 시기에 이미 유교사상에 입각한 종묘 제사의례 및 그것들을 수용하는 건축 형식들이 완비되어 하나의 국가제도로 정해졌다. 우리의 경우 유교적인 종묘사직 제도 자체는 삼국 시대에도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고려가 이들의 제도를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은 아니었다. 고려의 예제 제도 자체가 삼국시대 혹은 통일 신라 시기 전통을 계승하기보다는, 중국의 오례 체제를 받아들여 새로운 예제 질서를 구축하려 한 성격이 강했다.
고려에서 종묘사직을 설치한 것은 개국 후 70여 년이 흐른 성종 때였다. 최종적으로 991년(성종 10)에 사직단을, 이듬해인 992년에 태묘를 낙성하였다. 그 후 종묘와 사직이 처음으로 맞은 위기는 1011년(현종 2)의 거란의 침입이었다. 이때 거란군이 개경에 들어오자 현종은 황급히 개경을 떠나 나주까지 몽진을 가야 했는데, 이때 개경의 태묘, 궁궐, 민가들은 모조리 소각되었다. 침입이 마무리된 후 3년 동안은 신주를 모실 곳을 짓지 못해 각 왕릉에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가 1014년(현종 5)에야 임시로 재방(齋房)을 짓고 태묘의 신주를 모셨다. 같은 해에 사직단도 수리하였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태묘를 중수한 것은 1027년(현종 18)의 일이었다. 1052년(문종 6)에는 황성 안 서쪽에 사직단을 신축하고, 그 달에 왕이 직접 가서 제사를 지내는 변화가 있었다.
태묘·사직단의 또 한번의 커다란 시련은 바로 몽고 침입이었다. 1232년(고종 19), 고려 정부는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태묘와 사직의 신주들도 같이 옮겼다. 이들은 원종대 개경으로 환도한 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태묘의 경우, 1272년(원종 13)에 건물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개경 이판동(尼坂洞)에 잠시 모셔지기도 하였다. 이후 1291년(충렬왕 17) 무렵 합단(哈丹)의 침입으로 1년여 잠시 강화도로 천도하였을 때나 공민왕 때 홍건적의 침입 때도 급히 태묘와 사직의 신주들은 황급히 옮겨지곤 하였다.
몽고 침입이 태묘에 있어 큰 시련이었던 이유는 신주들이 이리저리 쏠려 다녀야 했던 점 뿐만은 아니었다. 강화도에서도 돌아오면서 ‘창졸간’에 지어서 그랬다고 후대에 우회적으로 표현되기는 하였으나, 제반 제도가 격하되는 속에서 태묘도 9실의 제도를 유지할 수 없어 5실로 지어진 것이다. 이는 부원세력을 몰아내고 난 1357년(공민왕 6)에야 다시 9실제로 회복되었다.
왕조만 보존되면 그래도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던 종묘ㆍ사직은 고려가 망하면서 그 운명을 다하였다. 그나마 사직은 조선시대에 지방 각 군현에도 설치되기 때문에 이후에도 나름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종묘의 운명은 그렇지 않았다. 망한 왕조의 조상신은 모실 가치가 없는 것. 태조 이성계가 즉위한 그 해 10월에 개경의 종묘는 헐려지고, 그 자리에는 태조 이성계를 위한 새로운 종묘가 건설되었다.(이것은 천도 논의가 벌어지면서 얼마 안 가 중지되었다.) 이로써 고려 개경 종묘는 400년의 오랜 역사를 마감하였고, 그 명맥은 숭의전(경기도 연천군)이라는 초라한 사당에서나 이어지게 되었다.
<“천자국” 고려의 태묘와 사직>
조선의 경우에는 고려의 길례에 포함되어 있던 하늘에 대한 제사인 원구와 땅에 대한 제사인 방택조가 빠져 있고, 오직 종묘와 사직만이 포함되어 있다. 원구 제사와 방택 제사는 원래 천자만이 지낼 수 있는 제사인데, 고려에서는 그것을 행했던 반면 제후국인 조선으로서는 설행할 수 없는 제사라고 여긴 것이다.
태묘의 경우도 고려에서는 제후의 예인 5묘제가 아니라, 태조묘와 함께 7묘제로 변형 운영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태조 왕건의 묘실에는 옥책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중국 천자에나 준하는 특별한 의전이었다. 이외에도 제기를 놓는 그릇인 변두의 숫자나 폐백, 재계하는 일수 등에서는 천자국인 중국 당나라의 제도와 동일하였다.
한편 고려의 사직은 너비가 5장이었는데, 원래 중국 주나라 제도에 따르면, 천자의 사직은 너비가 5장이며, 제후의 사직은 그 절반인 2장5척이어야 한다. 이를 보면 고려 사직 역시 천자의 제도를 준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의 사직은 너비가 2장5척이었는데, 여기서 조선에서는 고려 사직의 ‘참람된’ 크기를 수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전반적인 점에서, 고려가 지향하던 천하관을 엿볼 수 있다. 바로 자신들의 국가나 왕실이 중국과 대등하고 자신들이 ‘천자국’에 살고 있다고 믿었던 고려인들의 신념이다.
<조상 숭배의 또다른 모습, 원당과 진전>
태묘가 유교적인 조상숭배 형식이었고, 고려 시기에 그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에 큰 영향을 주기는 하였다. 그러나 고려 시기에 조상숭배를 실천한 주요 장소는 사실은 태묘보다는 절[願堂]이나 진전(眞殿)이었다. 고려 초부터 왕실이나 관료들은 원당을 만들어 제례를 실천하였고, 이러한 원당에는 왕실 인물의 초상화를 모시는 진전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또한 독립된 진전도 있었는데, 경령전(景靈殿)이 그것이었다. 이곳에 사용되는 비용과 배려는 태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왕실에서 원당을 통한 조상숭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불교에서도 효(孝)를 강조하고 있어, 유교와 같은 맥락에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개경과 그 주위의 원당에 있었을 수많은 고려 왕실의 초상화는 어떻게 되었을까? 개성의 수많은 사찰들이 조선 시대 들어와서 유지되기가 거의 힘들었고,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고려 왕실의 초상화가 아직 숨겨져 있지는 않을까. 고려 왕가의 얼굴들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