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성균관> |
<고려 태묘와 사직의 역사>
개경 국자감은 992년(성종11) 밝고 깨끗한 땅을 골라 학교를 세우라는 성종의 명에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100년 가량이 지난 1089년(선종 6)에는 국학을 수리하고, 공자상(孔子像)은 순천관(順天館)에 옮겼다가 2년 후에 72현의 초상을 그려서 국자감의 벽 위 각각의 자리에 붙였다. 1119년(예종 14)에는 국자감의 재정을 보조하기 위한 양현고를 두고, 7재를 두어 관학을 진흥시키는 발판을 삼았다. 원 간섭기에는 국자감의 명칭상 변화가 매우 심하여, 성균감도 되었다가 성균관도 되었다가 다시 국자감으로 복원하기도 하였다. 명칭 변화는 당시 전반적인 관제 격하와 관련이 깊기도 했지만, “성균관(成均館)”이라는 이름 자체는 이때 성리학을 수용하면서 주나라의 대학인 ‘성균’의 명칭을 원용한 것에서 기인한다. 공민왕 때 성균관의 복구는 당시 성리학이 수용되고 유학이 진흥되는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고려 성균관 명륜당> |
국자감은 어디에 있었을까? [고려도경]에 따르면, 남쪽 회빈문 안에 있다가 예현방(봉은사 근처)으로 옮겼다고 전하고 있다. 국자감의 위치와 모습에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공민왕 때에 있었던 홍건적의 침입이었다. 이때 성균관이 허물어지자 1367년(공민왕16) 새로 탄현문 안쪽의 숭문관 옛터에 다시 지었다. 원래 이곳은 문종이 창건한 대명궁이란 별궁이었다가 순천관이라 개칭하고 외국 손님을 접대하는 곳으로 용도를 바꾸었던 내력이 있던 곳이었다.
개성 성균관은 강당인 명륜당이 앞에 있고, 제사공간인 대성전이 뒤에 위치한다. 그에 반해 한양의 성균관은 대성전이 앞에 위치하고, 뒤에 명륜당이 있다는 차이가 있다. 개성 성균관에는 원래 공자의 소상이 있었다. 1320년(충숙왕 7)에 공자의 소상을 만들었는데, 15세기에 개성에 놀러갔던 사람들이 원나라의 영향이라고 보면서 구경하였던 것이기도 하였다. 고려 성균관에 화상이나 소상이 쓰인 것은 선현(先賢)에 대한 제사를 부처에 예불하듯이 행한 것으로 불교와 도교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던 고려 사상계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