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의 글씨> |
문종을 전후한 시기에 관학이 부진하게 되는데, 재정도 어려워진 데다가 가르치는 학관이 무능하고 불성실했던 것이 그 원인이었다. 더구나 문벌귀족 사회가 성숙되면서 귀족자제를 교육할 새로운 교육기관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배경이 무르익으면서 사학(私學)이 생겨나게 되었다. 사학의 시대를 열었던 것은 최충의 문헌공도(文憲公徒)였다. 최충은 9년간의 재상직을 포함하여 23년간 중앙정치 무대에서 활약하였고, 1026년(현종 17)과 1035년(정종 원년) 두 차례에 걸쳐 지공거를 맡은 화려한 경력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벼슬을 그만두고 난 후, 그는 송악산 아래 자하동에 학당을 마련하여 9재(九齋)라는 아홉 가지 전문강좌를 개설하였다. 전문 강좌뿐만이 아니었다. 매년 여름철이면 개경 탄현문 밖에 있는 귀법사의 승방을 빌려 여름 학교를 열고, 자기 도(徒) 출신의 급제자 가운데 아직 관직에 취임하지 않은 우수한 사람을 뽑아서 교도로 삼았다. 또 간혹 먼저 진출한 선배가 찾아오면 여러 생도들과 더불어 각촉부시를 열었다. 이는 초에 눈금을 그어 초가 그 금까지 타는 시간을 정하여 시를 짓는 대회이다. 각촉부시는 사실 과거시험의 관건이었던 시(詩)와 부(賦)를 제한된 시간에 빠르게 잘 짓는 것을 공부하는 훈련과정이었다고 하겠다.
최충의 문헌공도로 시작된 사학의 열풍은 유명한 12개의 사립학교를 설립하게 하였다. 사학 12도의 설립자는 대부분 문하시중까지 역임한 고위 관료출신자로, 과거 합격자 출신에 시험관(지공거)을 역임하였다. 당대의 귀족 자제들은 관학인 국자감보다 여기에 입학하는 것이 보다 수준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학설립자들이 과거 시험의 지공거라도 될라치면, 과거 합격에 좀더 유리한 입장에 서기 마련이었다. 결국 사학은 특권층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던 셈이다.
사학12도는 무인집권기나 원 간섭기를 거쳐 고려말까지 존속하였다. 무인집권기의 이승장은 어렸을 때부터 문헌공도의 솔성재에 들어가 공부했고 과거급제 후 사문태학박사와 감찰어사를 지냈다. 이규보는 14살 때 성명재에 적을 두고 여름 학교 때마다 1등을 하자 선배들이 탄복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1391년(공양왕 3)에 와서 사학 12도는 폐지되었다. 조선에 들어서 서원이 설립되기 이전까지 사립학교의 활동은 침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