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남대문>


 


<개경의 조선 성곽 – 내성>


개경의 내성은 황성과 나성 사이에 있었던 성곽이다. 북쪽과 서쪽 성벽은 기존의 나성 성벽을 그대로 이용한 토성으로서 그 둘레는 약 5.8㎞이고, 남쪽과 동쪽 성벽은 돌로 새롭게 쌓은 것으로 약 5.4㎞이며, 현재 북쪽과 동북쪽 성벽의 석성 부분이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다고 한다.
원간섭기 이후 고려말기에는 왜구의 침략이 빈번하여 개경까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철원으로 천도하려는 움직임까지 있기도 하였고, 개경 자체의 수비를 강화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결국 범위가 너무 큰 나성 대신 그 보다 작은 성곽을 쌓아 변고에 대비하려는 맥락에서 수축된 것이 내성이었다. 1391년(공양왕 3)에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재변 등을 이유로 중지하였다가 조선이 건국되면서 무장 출신이었던 태조 이성계가 강력하게 밀어붙여 공사를 재개하여, 1393년(조선 태조 2)에 완성할 수 있었다. 그 성곽의 둘레는 20리 40보(약 11.2㎞)이며, 현재 개성시 북안동 중심네거리에 위치한 남대문은 그 역사의 증거이다.


<조선 태종 이방원의 집 – 경덕궁>


고려의 수도 개경에는 조선의 궁궐이 있다. 바로 경덕궁이다. 수창궁에서 남쪽으로 한참 내려오면, 경덕궁터가 있는데,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곳이고, 이방원이 살았던 적도 있다. 태종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 이곳에서 살 때, 후에 태종의 후궁이 된 시비 김씨가 백룡을 보았다는 얘기가 전해 온다. 그래서 그런지 조선 태종대에 이르러 궁궐로 만들고 태종이 자주 거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이미 얼마 지나지 않아 퇴락하여 터만 남게 되었다.


<이성계의 집>


궁궐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또 다른 이성계의 집이 있었다. 개경의 동부에 있었던 것으로 이곳은 나중에 목청전이라 하는,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는 진전(眞殿)이 되었다.


<개경 외곽의 조선 궁궐>


한편 개경 외곽에도 조선의 궁궐이 있었다. 바로 정종릉인 후릉 경내에 있었던 인덕궁이다. 정종은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 상왕으로 이곳에 거주하였다. 그 자신은 개경과 관련이 많았다.








<숭양서원>


 


그의 아버지가 기껏 한양으로 천도했는데, 그에 이르러 개경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정종 자신의 뜻이라기보다는, 태조 이성계의 한양 천도에 대한 반동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종은 자신의 치세의 대부분을 개경에서 보낸, 개경과 가장 관련이 깊은 조선의 왕이 되었다. 상왕으로 거주한 곳도 개경 남쪽이었으며, 바로 그곳에 묘자리가 정해졌다.


이외에도 정몽주의 집이었던 숭양서원이나, 선죽교 등은 실제로는 조선의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초 비구니들의 거처가 되었던 정몽주의 고택을 서원으로 만들어 그를 배향한 것도 조선 때의 일이요, 난간이 없던 선죽교에 난간을 만들고 보호한 것도 조선 후기 정조 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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