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의 개성>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음력 10월 25일 개성을 떠나 한양으로 출발, 3일 후 한양부 객사에 여장을 풀었다. 그러나 5년 만인 1399년(정종 1) 정종은 개성으로 다시 돌아와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기까지 6년이라는 시간과 권좌의 주인이 바뀌는 큰 변화가 필요했다. 1405년(태종 5) 겨울, 태종은 아버지가 건설한 한양으로 다시 옮겨왔고, 이 날, 개성은 500년 가까이 이어온 수도의 이름을 영영 잃어버리고, 600년 수도로서의 한양의 역사는 흔들림 없는 반석 위에 올랐다.
조선 개국 초까지만 해도 개경은 지기(地氣)야 어쨌건 간에 제일의 명당이라는 점에서는 의심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1세기가 지나면 상황은 역전된다. 한양이야말로 그 형세가 “만세에 빼지 못할 큰 터”이며, “동경(경주), 서경(평양), 개경 – 삼경의 형세는 그 만분의 일도 방불할 수 없다”고 공표한 것이다. 신화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한양 천도 후 개성에는 개성유후사(留後司)가 설치되었으며, 1438년(세종 20) 개성부로 승격, 경관직인 종2품 유수(留守)가 설치되었다. 이후 수차례 외관직과 경관직으로 바뀌는 것을 거듭하다 1469년(예종 1)에 경관직으로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초기의 지방관제는 한성부와 개성유수부, 팔도체제가 되었다.
조선 정부에서 개성에 경관인 유수를 파견하여 둔 이유는, 고려의 옛 수도였다는 역사적인 배경도 중요했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 경기도와 황해도에 끼여 있어 중요한 군사 요충지이기도 하였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한편 고려 때의 유적과 유물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급속하게 쇠락해 갔는데, 그러나 조선의 도시로서 개성이 맞은 가장 큰 위기는 다름 아닌 임진왜란이었다. 15세기 세종 때 6,000여 호를 헤아리던 개성의 호수는 임진왜란을 겪은 후인 17세기 인조 때 무려 1,200호로 감소되고 말았으며, 전쟁 이전 4천여 결로 추산되던 전결총수가 반도 되지 못하는 1,760결에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잠시 위축되었던 개성의 상업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어 갔다. 이 시기에 오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가속화되어 규모가 큰 상인들은 자본을 축적하게 된 반면, 영세한 행상들은 파산하는 등 상인층의 분해가 이루어졌는데, 인삼 재배와 중계 무역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당시 개성에는 중국과 무역을 통하여 이익을 취한 거부가 한양 다음으로 많았다고 지적한 것은 이러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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