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공연단체


 


북한에서 공연을 담당하는 단체는 크게 전문예술인 단체와 비전문예술인 단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북한을 대표하는 공연단체는 평양에 소재하면서 중앙기관 직속의 국립 중앙예술단체이다. 각 도에는 도를 대표하는 전문예술단이 ‘○○○도예술단’의 형식으로 꾸려져 있다.


 


중앙의 공연예술 단체는 각 장르에 따라 나누어질 수 있는데, 가극과 가요, 무용을 담당하는 공연단은 ‘가극단’ 또는 ‘예술단’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고, 연극, 인형극 등을 담당하는 공연단은 ‘극단’의 명칭을, 교예를 담당하는 공연단은 ‘교예단’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북한의 중앙 공연단체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가극을 주로 공연하는 ‘피바다가극단’과 ‘만수대예술단’이다.


피바다가극단은 가극을 기본으로 하면서 다양한 음악, 무용 작품들을 창작 공연하는 중앙의 종합예술단체이다. 평양대극장을 거점으로 하여 월 20회 정도 가극, 음악, 무용 등의 공연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히 ‘혁명가극’ 공연에서 두각을 나타낸 예술단이다. 1946년 ‘북조선가극단’으로 창립되었으며, 1971년 7월 17일 새로운 형식의 혁명가극을 창조하기 위한 ‘가극혁명’의 과정에서 ‘피바다가극단’으로 개칭, 재창립되었다.





가극 <피바다>의 마지막 장면

피바다가극단은 1971년에 ‘혁명영화’ 〈피바다〉를 가극으로 옮긴 ‘혁명가극’ 〈피바다〉를 창조함으로써 ‘〈피바다〉식 혁명가극’ 창조의 새 기원을 열어놓았다. 또한 음악무용이야기 〈낙원의 노래〉(1975년), 음악무용서사시 〈영광의 노래〉(1982년), 5천 명대공연 〈행복의 노래〉(1987년)라든가, 무용 〈새봄〉(1974년), 〈쟁강춤〉(1986년), 〈칼춤〉(1986년), 가요 〈새봄〉(1973년), 〈내 나라는 행복의 락원(1980년),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네〉(1994), 민속무용조곡 〈계절의 노래〉(1992년), 전설무용극 〈봉선화〉(1995년) 등 수많은 작품들을 창작, 공연하였다. 최근에는 〈백전백승 조선로동당〉(2000~2001년), 〈아리랑〉(2002년)의 창작과정에도 피바다가극단이 대거 참여하였다.


단원 700명 정도의 피바다가극단은 창작지도부와 합창부, 무용부, 무대미술부, 3관 편성의 교향악단 등 혁명가극창조에 필요한 여러 개의 창조부서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노력영웅, 인민예술가, 인민배우, 공훈예술가, 공훈배우 등 수백 명의 창작가와 예술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1972년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가극 <꽃파는 처녀 > 중 ‘마을사람들’ 장면

만수대예술단 역시 가극과 음악, 무용 작품들을 창조 공연하는 중앙예술단체이다. 특히 무용 분야에서 크게 활약한 예술단이다. 1969년 9월 27일 평양에서 조직되었으며, “주체예술의 본보기단체를 조직하고 그것을 전형으로 하여 예술 전반을 새로운 단계로 올려세우고자 하는” 김정일의 특별지도에 의해 전국에서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만 선별하여 만들어진 예술단으로 1970년대 가장 왕성한 활동력을 보인 바 있다. 만수대예술극장과 동평양대극장을 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단원은 600~700명 정도이며 부서는 창작집단, 공훈남성중창조, 여성중창조, 공훈여성기악중주조, 무용조, 관현악조, 무대조로 구성되어 있다. 만수대예술극장을 전용극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를 통해 예술단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고, 음악무용이야기 〈낙원의 노래〉(1976년)를 통해 “주체시대의 새로운 무대종합예술형식의 본보기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수많은 가요와 기악곡 등을 창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눈이 내린다〉(1967년, 당시 국립가무단), 〈조국의 진달래〉(1971년), 〈키춤〉(1977년) 등의 ‘혁명무용’을 창조하는 성과를 보였다.


이 예술단은 1980년대 들어서도 음악 및 무용 분야에서 많은 활약을 펼쳤고, 1972년 〈김일성 훈장〉을 받았다.


 







 혁명가극 <금강산의 노래>


 


국립민족예술단은 가극과 음악무용종합공연을 하는 중앙예술단체인데, 특히 민요, 민속무용, 민족가극 등 민족적 색채가 짙은 작품의 창조 공연에 주력하고 있는 예술단이다. 평양시 중구역에 위치한 국립민족예술단은 1972년 4월 3일 창립 당시에는 ‘평양예술극단’이었으나, 1975년 12월부터 ‘평양모란봉예술단’으로 개명하였다가 1985년 ‘평양예술단’으로 개명하였다. 1992년 현재의 ‘국립민족예술단’으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립민족예술단의 주 활동무대는 1982년 7월에 개관한 봉화예술극장이다.


1970년대 초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 〈금강산의 노래〉 등을 창조 공연하였고, 〈언제나 어디서나 수령님 우러러〉 등 수많은 가요와 〈강선의 노을〉, 〈풍년든 들판에서〉, 〈장고춤〉 등 무용을 만들어 냈다.


특히 1988년 ‘민족가극’ 〈춘향전〉 이후 민족가극 〈심청전〉, 민족가극 〈박씨부인전〉을 연이어 공연하면서 민족가극 전문 공연단체로 자리잡았다.


또한 1997년 전통무용과 기악곡을 중심으로 진행된 민속무용조곡 〈평양성 사람들〉은 북한식 ‘민족문예’ 창조의 선봉에 국립민족예술단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작품은 ‘임진왜란 때 자기 조국과 향토를 무한히 사랑하며 그를 지켜 용감히 싸운 평양성 사람들의 슬기롭고 근면한 기상’을 그리고 있다.


이 예술단은 1973년 〈김일성 훈장〉을 받았다.







혁명연극 <성황당> 제5장의 무대미술 원화


 


다음으로 ‘국립연극단’은 연극을 전문으로 창조 공연하는 북한의 대표적인 중앙 연극공연단체이다. 우리의 국립극단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1946년 5월 23일에 조직된 ‘중앙예술공작단’을 전신으로 하여 창립되었으며, 1947년 1월 9일 ‘국립극장’으로 개칭되었다가, 전후 ‘국립연극극장’으로 되었다가, 1972년부터 ‘국립연극단’으로 개칭되었다.


초기에는 연극 〈춘향전〉, 연극 〈심청전〉 등 고전작품을 비롯하여 송영의 〈금산군수〉(1949), 〈불사조〉(1959), 한태천의 〈명령은 하나밖에 받지 않았다〉 등을 안영일·이서향·황철 등의 연출로 공연하였고, 1960년대 후반부터는 집체작의 형태로 이른바 ‘혁명연극’들을 창조하였다. 천리마기수들의 전형을 형상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우리는 행복해요〉(1960년), 인민상계관작품인 〈붉은 선동원〉(1961년), 대표적 ‘수령형상창조’ 공연인 〈승리의 기치따라〉(1968년), 〈혁명의 새아침〉(1971년) 등이 이 시기 대표작이다.


1978년 김정일의 지도에 의해 〈성황당〉을 공연한 이후에는 〈혈분만국회〉(1984), 〈3인1당〉(1987), 〈딸에게서 온 편지〉(1987), 〈경축대회〉(1988) 등 북한의 ‘5대 혁명연극’을 ‘〈성황당〉식 연극’으로 재창조하는 등 100여 편의 장막극과 270여 편의 중단막극을 공연하였다.


1990년대에도 〈승냥이〉, 〈소원〉 등의 ‘혁명연극’을 발표하는 등 ‘국립연극단’은 북한연극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국립연극단’에는 13명의 인민배우와 10명의 공훈예술가, 그리고 40여 명의 공훈배우가 소속되어 있다. 국립연극극장을 거점으로 공연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현재 ‘국립연극단’의 중심 멤버들은 1978년 〈성황당〉 공연에 출연하여 북한연극계의 중추가 된 리단(연출가), 리병수(무대미술가), 고옥성(복순이 어머니 역), 곽원우(만춘 역), 김춘남(돌쇠 역) 등이다.


이 극단은 1972년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평양인형극단은 인형극을 전문으로 창작 공연하는 예술단체이다. 평양시 모란봉구역 전승동에 위치하는 평양인형극단은 1955년 문화선전성 산하 대중예술극장에 만들어진 인형극부가 모체가 되어 1958년 3월 인형극단으로 발전한 다음, 1961년 독립적인 중앙예술단체인 평양인형극단이 되었다.


〈밭곡식의 왕〉(1956년), 〈홍보와 놀보〉(1957년), 〈혹 뗀 이야기〉(1960년), 〈뿔 난 너구리〉(1962년), 〈세 동무〉(1969년) 등 단막, 장막 형식의 인형극을 공연해 오던 평양인형극단은 1970년대 들어 김일성이 들려준 동화를 각색한 인형극들을 제작하여 새로운 시기를 맞는다. 동화 〈놀고 먹던 꿀꿀이〉를 각색한 단막인형극 〈꿀꿀이〉(1971년)가 그 대표적 작품이다. 이후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이 들려주었다는 동화를 원본으로 제작한 인형극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셋째의 착한 마음〉(김정숙, 1990년), 〈울리지 않는 종〉(김일성, 1993년), 〈봉선화〉(1999년) 등이 그 대표적 작품이다. 특히 〈셋째의 착한 마음〉은 ‘〈성황당〉식 연극’ 형식의 성과와 경험을 인형극의 특성에 맞게 받아들여 창조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북한 인형극의 대표작이다.


평양인형극단에는 창작창조과, 배우과, 무대과, 인형제작과의 부서가 있다.


 


                


국립희극극단은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1995년 창립된 희극 전문극단이다. 북한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인 1990년대 중반에 이 극단을 만든 것은 웃음을 통해 주민들의 누적된 불만과 스트레스 해소에 기여하겠다는 목적으로 보인다. 김정일은 희극이 주민 사기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하여 ‘지나친 과장, 웃음에만 치우치지 않고 사상적 내용과 교양적 가치를 잘 조화시켜 나갈 것’ 을 강조하였다.


희극극단의 대표작으로는 재담 〈제정신을 가지고 살자〉, 〈제것을 사랑하라〉, 독연극 〈잡귀신〉, 〈특수 방탄복〉, 만담 〈부모를 잘 모시자〉, 사이극 〈인심 좋은 작업반장〉, 촌극 〈다같이 충고할 때〉, 희극 〈웃으며 살자〉 등이 있다. 대부분 작은 규모의 작품들이다. 연출형식은 우리의 코미디와 거의 유사하다. 북한에서 가장 인기 있는 희극배우로 장철호가 있다.


평양교예단은 평양시 만경대구역에 위치한 교예(우리의 서커스와 마술에 해당)를 전문으로 창작 공연하는 중앙예술단체이다. 평양교예단은 한국전쟁 당시인 1952년에 6월 10일 약 20여 명이 ‘국립교예단’이라는 이름으로 창립하였다.


단원은 1천200~300명으로 공중교예를 하는 배우1과, 동물교예를 하는 배우2과, 요술을 보여주는 요술과, 수중교예과, 빙상교예과 등으로 구성돼 있다. 평양시 광복거리에 있는 ‘평양교예극장’을 전용극장으로 주 5회 정기공연을 하고 있다.


평양교예단은 체육과 예술의 결합, 다양성과 민족성 함양이라는 창작원칙을 세우고 지난 50여 년간 체력교예 330여 편, 요술 310여 편을 비롯하여 동물교예, 빙상교예, 수중교예 등 총 970여 편의 작품을 창작 공연하였다. 국내공연 37,930여 회를 비롯하여 중국,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모로코 등 70개 나라 5,620여 회의 해외공연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평양교예단은 35차례에 걸친 국제 교예 및 요술축전에 참가하여 60여 개에 달하는 최고상, 특별상, 금메달 등을 수상했다고 한다. 〈널뛰기〉, 〈전회비행〉, 〈날아 다니는 처녀들〉, 〈공중철봉비행〉, 요술 〈사과풍년〉·〈신기한 힘〉·〈우산재주〉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특히 4바퀴 돌아잡기, 몸을 펴고 3바퀴 돌아잡기 등 난이도가 높은 〈날아다니는 처녀들〉은 세계적인 공중곡예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평양교예단은 교예예술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지난 1972년과 1982년 ‘국기훈장 제1급’을, 지난 1977년에는 북한 최고의 훈장인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인민예술가 박소운, 김재근 부자요술가들이며 인민배우들인 김택성과 그의 아들 김철, 김광철 등 수십 명의 명예칭호 소유자들을 배출하였다.


한편 평양교예단은 지난 1999년 말 통일농구대회 때 서울에서 환상적인 묘기를 선보였고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직전에도 서울공연을 한 바 있다.


집단체조창작단은 엄밀히 말해 예술창작 집단이 아니라 체육창조집단이다. 그렇지만 집단체조에 예술성이 중요한 요소로 평가되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예술단체로 포함시켰다. 즉, 집단체조창작단은 “집단체조작품을 창작하고 보급하며 북한의 집단체조를 전망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사업을 책임지고 조직지도하는 전문기관”으로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소속단체이다. 1971년 11월 1일 창립했으며, 평양시 모란봉구역에 위치해 있다. 부서는 창작연출부, 체조창작부, 배경대창작부, 음악창작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외 기재, 의상 창작을 전문으로 하는 기술부서들, 보장부서들이 있다. 1985년 11월 7일 〈김일성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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