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적이지만, 식민지배를 경험해 본 우리나라 사람들은 식민지배를 당해보지 못한 민족들보다 더 식민지배에 대해서 모른다고도 할 수 있다. 식민지배를 당하는 아픔 일반에 대해서가 아니다. 왕조는 망하고, 수시로 식민지 경찰이나 헌병들이 어디에고 어슬렁거리고, 토지는 강탈당하고, 성도 갈아야 하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고 글자도 잃어버리고, 짐승처럼 끌려가서 혹사당하는 것, 그리고 누이들은 성노리개까지 되어야 하는 등 그런 참혹한 모습말이다.
하지만 이는 여러 유형의 식민 지배 중에 매우 예외적인 모습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는 아시아인에 의해, 그것도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 그리고 또 당시 세계에서 식민지 경영 국가들 중의 가장 후발 주자에게, 더 나아가 역사 속에서 늘 열등의식 내지는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던 나라에게 식민 지배를 당한 통에 겪은 대단히 야만적이고 저급한 식민지배의 경험일 뿐이다.
통상적으로 식민지배 유형은 직접지배와 간접지배로 나뉜다. 당연히 일본의 조선지배는 직접지배인데 식민지배를 받았던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 중에서 직접지배를 당한 곳은 조선과 버어마 정도이다. 나머지는 모두 간접지배든가 직접지배와 간접지배를 병용하는 형태였다.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는 바로 직·간접 지배의 병용이었다. 1858년 베트남을 공격하기 시작한 프랑스는 이듬해 남부 사이공 점령을 시작으로 1870년대 초반까지 남부베트남(코친차이나)을 다 점령했고, 1880년대까지 북부(통킹)와 중부(안남)를 전부 차지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직접 지배를 실시한 곳은 남부 코친차이나뿐이었다. 중부 안남은 명목상이나마 베트남 황제가 존속하여 지배하는 형태였고 북부 통킹은 안남 황제와 프랑스 측이 공동으로 관할하였다. 그래서 프랑스 지배 하의 베트남은 북부, 중부, 남부가 나뉘어 남부는 명실상부한 식민지, 중부는 보호국, 북부는 보호령으로 각각 성격을 달리했다. 여기에 베트남의 이웃으로서 인도차이나 반도에 속한 캄보디아와 라오스 역시 왕정을 그대로 유지한 보호국으로 남아 있어서 이들을 포함한 영역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총독이란, 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는 이를 가리킨다. 일본의 조선 지배보다는 훨씬 느슨한 형태였음이 분명하다.
![]() 베트남의 황궁(필자 사진: 2001년) |
식민지배 방식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총독인데,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던 총독의 면모는 조선을 지배하던 총독들과 매우 다르다. 초대 데라우찌 총독을 비롯해서 조선 총독은 모두 군인이었으며 본국 역시 군인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파쇼 국가였던 상황에서 그들의 조선 지배는 대체로 무자비하고, 야만적이며 야비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베트남 지배 시기 프랑스는 적어도 정치체제상 민주국가였으며 보수파와 개혁파, 또는 좌파와 우파 사이의 정권 교체가 활발하던 시기였다. 본국의 정세에 따라서 대단히 보수적이고 탄압적인 인사가 부임해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자유주의적이고 계몽적이며 양심적인 인사가 부임해 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기실 이는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미국, 영국, 네델란드 등의 지배를 받았던 여타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던 현상이었다.
그러나 형태가 어떠했든지 간에 타국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수치스럽고, 고단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지배하는 입장에서도 자선을 위해서, 또는 피식민지의 발전을 위해서 자기 희생을 할 리는 없다. 식민지배의 요체는 이윤의 획득인 것이며 모든 제 지배형태는 이런 이윤 획득을 최대화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이라고 여겨지는 방법을 선택하는 차이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메콩 유역에서 생산되고 독점되던 엄청난 양의 쌀은 프랑스의 주요 수출 품목이었으며, 고무 농장, 커피 플랜테이션 등에서의 노동력 착취 및 이에 대한 방조는 단골로 열거되는 프랑스 식민지배의 단면들이다. 게다가 프랑스는 재정수입을 위해서 일반 베트남인들의 필수품인 소금 및 주정(酒精)은 물론이고 아편까지도 전매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