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천 여 년에 걸친 중국 지배기를 이겨내고 독립한 후 (10세기), 중국을 지배한 모든 통일 왕조들의(송, 원, 명, 청) 예외 없는 침입을 모두 이겨낸 베트남이란 나라를 하필 식민지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불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프랑스가 베트남 땅에 발을 딛자마자, 그러니까 남부베트남에 프랑스군이 진입하자마자 저항운동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보자면 혹 이런 모습은 당연한 듯해 보인다. 그러나 외세가 들어온다 해서 늘 저항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외세는 그저 강력한 지배자로밖에 인식되지 않는다. 강력한 지배자에게는 복종이 당연한 것이며 식민지배를 당하면서도 기꺼이 새로운 지배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저항은 민족 또는 적어도 운명공동체라는 의식 내지는 왕에 대한 충성을 당연시하는 사회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왕이나 왕실에 대한 충성은 유교적 이념의 주입에서나 가능하다. 일본군이 들어 왔을 때 위정척사운동이 일어난 것이나 동학운동이 재빠르게 왕실을 보호하겠다는 주장을 하게 된 것은 유교사회이었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베트남 역시 유교 이념이 광범위하게 퍼졌던 나라였다. 굳이 우리와 비교하자면 유교의 전래나 발전 속도는 우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그런 나라에 외세가 들어왔으니 조정에 대한 충성을 당연시하는 집단들의 반발은 예상된 것이었다. 일단은, 남부가 점령되는 과정에서 많은 유가 지식인들이 의병을 일으켜 프랑스군에 저항했다. 1880년대는 황궁을 탈출한 황제가 근왕의 조서를 내림으로서 전국의 유사들이 저항군을 조직하여 프랑스에 대항했다. 이를 일러 ‘근왕운동(勤王運動)’이라 한다. 근왕운동이 지속되는 가운데 다시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모색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로 프랑스에 대한 저항운동은 공화운동과 입헌운동으로 나뉘어졌다. 독립투쟁사에서 유명한 판 쭈 찐은 전자를, 판 보이 쩌우는 후자를 대표하던 인물이었다. 특히나 후자는 활동가로서나 저술가로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던 인물로 그가 저술한 {越南亡國史}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널리 읽혔던 책이다.


 







프랑스 침입 초기 남부의 저항 지도자 쯔엉 딘
(Truong Dinh 張定, 1821-1864)의 석상(필자 사진: 2002년)
1920년대 들어서 독립운동은 다시 공화파와 공산파로 나뉘게 되지만 궁극적으로 반외세 운동을 주도하게 된 건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이 공산운동을 주도하던 인물이 바로 호 찌 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모두 공산주의자들이 도맡았다는 말은 아니다. 다양한 주장을 갖는 운동체들이 존재했으나 프랑스에 대한 저항운동이라는 목표 앞에 이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공산주의자들이 한 것이며 그 작업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베트민(Viet Minh, 越南獨立同盟의 약칭)으로 불리게 되는 이 단체의 이름으로 범민족적인 저항을 전개하였으며 1945년 호찌민은 독립을 선언하고 왕조의 종결을 선포했으며 베트남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을 수립하였다.


 








호찌민 (Ho Chi Minh 胡志明, 1890-1969)


그러나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는 운동체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다른 방식으로 프랑스에 저항했던 사람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공산주의를 수용하기 힘들어하는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무시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베트남민주공화국이 북부를 중심으로 수립되자마자, 남부에는 다시 프랑스군이 재진입했고 베트민 세력을 부정하는 집단들에 의한 정권이 수립되었다. 베트남 전체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선언한 이 국가(State of Vietnam)의 수장은 베트민에 의해 강제 퇴위당해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Bao Dai 保大)였는데, 그에게 호찌민 집단은 또 다른 외세의 앞잡이(공산주의자)이며 반역자들이었을 뿐이다.



베트남의 해방에 대해서 의문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없었지만 어떤 식으로 베트남이 독립해야 하는지가 관심사가 된 것이다. 혹, 호찌민 세력을 민족주의 집단으로, 남부 정권을 반민족주의 집단으로 양분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대단히 단순하고도 어리석은 양분법이다.


 







바오 다이 황제 (가운데, 1913-1997, 재위 1926-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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