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 응우옌 지압 (Vo Nguyen Giap 武元甲) 장군

많은 사람들은 남부 정권이 프랑스의 비호 하에 수립되었으며 결국 프랑스의 괴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호찌민 역시 프랑스의 복귀를 반겼으며 그가 정권을 세운 북부에 프랑스군이 주둔할 것에 동의하기까지 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치 우리나라에 소련군과 미군이 진주했듯이 2차대전 종료 후에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현지 치안유지를 위해 베트남 북부에는 중국군(국민당군), 남부에는 영국군이 진주했다. 호찌민으로서는 이 국민당 중국군이 큰 위협이었다. 마치 자기의 국가는 역사적인 적이었던 중국군에 점령된 듯했으며 중국군과 더불어 진주한 국민당 계열 베트남 혁명가들의 세력 확대도 큰 걱정거리였다. 중국군을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호찌민 측은 영국군의 뒤를 따라 바로 들어온 프랑스군을 이용해야 했던 것이다. 이 방법은 성공적이었고 그 성공 뒤에 프랑스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호찌민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배후의 중국에서 엄청난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1949년 국민당이 무너지고 공산당이 대륙을 장악했다. 그 뒤에는 북한과 소련이 있었으니 이제 든든한 후원자들이 생긴 셈이었다. 중국으로부터, 소련으로부터, 동구권으로부터, 그리고 북한으로부터 군수 지원이 시작됨에 따라 북베트남은 이전보다 훨씬 안정된 조건 속에서 전쟁하고 담판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베트민 세력의 게릴라전에 질질 끌려 다니면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결전장이 필요했고 그 결전을 통해 베트민의 주력군을 궤멸시켜야 했다. 베트남 북서부 그러니까 라오스로 넘어가는 길목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라고 하는 고원지대의 분지가 결전장으로 선택되었다. 이곳에 프랑스는 항공을 통해 군수물자를 보급하고 병력을 수송했다. 프랑스의 계산으로는, 베트민군은 이 견고한 군사 기지를 그대로 내버려 둘 리 없으며, 전투는 시작될 것이고 프랑스군들이 쏘아대는 기관총과 항공기 공중 폭격을 맞아 궤멸될 운명이었다.



이 작전은 프랑스군뿐만 아니라 세계의 어느 군사전문가들도 무릎을 치는 탁견으로서, 베트민군의 입장에서는 질 줄 알면서도 응해야 하는, 단지 항전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의미뿐인 싸움인 듯했다. 당시 참전했던 대다수의 베트민군의 심정 역시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20세기가 낳은 탁월한 군사지도자의 한사람으로서 이 전투에서 베트민군의 지휘를 맡았던 보 응우옌 지압(Vo Nguyen Giap 武元甲) 장군은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고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세계를 경악시켰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프랑스는 베트남으로부터 완전히 손을 떼었고 베트남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식민세력을 무력으로 축출한 나라가 되었다. 이는 아시아의 식민지 경험에서는 극히 예외적이다. 그러나 베트남의 역사 경험에서 볼 때는 예외가 아니라 반복되던 관행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10세기에 독립한 이후 한 번도 외세를 독자적인 무력으로 몰아내지 못한 적이 없다.



하지만 프랑스의 물러남은 곧 남북 대립의 본격적 시작이기도 했다. 프랑스가 물러난 후의 베트남 문제를 결정한 제네바 협정(1954년)에서는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하여 당분간 두 체제가 공존할 것을 정했으며 주민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거주지를 선택하게 했다. 그러나 이 제네바협정은 처음부터 준수되기 힘든 조항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정치체제에 대해서는 조만간 남북 총선을 실시해서 스스로 선택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인구비율이 높은 북부에서는 두 손을 들어 찬성할 사안이었으나 남부베트남 정부로서는 바보가 아닌 이상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명확한 결정 없이 남북은 분단되어서, 북부는 줄곧 호찌민의 지도 하에 이제는 당당히 공산국가로서 체제를 정비해 나갔고, 남부에는 과거 반불운동의 경력이 있고 미국과도 우호적이나 공산주의에는 혐오감을 갖고 있던 민족주의자 응오 딘 지엠(Ngo Dinh Diem 吳廷琰)이 대통령이 되는 베트남공화국(Republic of Vietnam)이 베트남국(State of Vietnam)을 대체하여 수립되었다(1955년). 이제 베트남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두 진영 간의 첨예한 대립의 장이 된 것이다.







항전열사추모탑(필자 사진: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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