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이후 베트남이 당면한 목표 가운데 다른 하나는 경제성장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당시 공산당 총비서였던 레주언(Le Duan)은 통일 이후 처음 열린 국회에서 조국을 열 배 더 크고, 열 배 더 아름답게 만들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베트남은 1976년 말에 열린 공산당대회에서 대규모 사회주의적 생산으로의 전환을 20년 내에 완성한다는 목표를 세웠었다. 이에 따라 1) 사회주의 산업화, 2) 대규모 사회주의적 생산으로의 전환, 3) 중공업 발전에 우선순위를 두며 농업과 경공업을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사회주의경제 건설노선을 확정하였다. 이렇게 목표를 지나치게 야심적으로 설정한 것은, 베트남 지도자들이 베트남전쟁에서 군사적 승리로 지나친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1976년부터 시작된 제2차 5개년 계획에서는 연평균 성장 목표를, 농업 8∼10%, 공업 16∼18%, 전체 국민소득 13∼14%로 잡았다. 그러나 사회주의 경제성장 모델은 중공업에 대한 투자를 중심으로 전체 경제의 성장을 유발하는 것이었기에 농업부문에 대한 투자는 비교적 소홀히 한 반면 공업부문에 대한 투자는 중시되었다. 더욱이 1978년부터 본격화된 농업집체화로 농민들이 생산에 대한 의욕을 잃게 됨에 따라 1970년대 후반 농업생산은 저조하여, 1976∼80년 간 농업부문 생산증가율은 연평균 1.9%에 그치고 말았다. 1976년 대비 1980년 주요 곡물생산도 6.7% 증가에 그쳐, 인구증가율 9.2%보다 낮았다. 즉, 전체적 생산은 늘었다 하더라도 그 이상으로 인구가 많아져 1인당 농업생산량은 적어졌다. 1인당 평균 연간 곡물 생산량은 1976년 274kg에서 1980년 268kg으로 감소하였고, 1인당 최소 소비기준인 300kg을 여전히 밑돌아, 많은 사람들이 식량부족상태에 처하였다. 베트남은 메콩델타와 홍하델타라는 곡창지대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족분을 메꾸기 위하여 1976∼80년 간 8,900만 톤의 식량을 수입하여야 했다.



공업부문에 대한 투자는 강조되었다. 1976∼80년간 정부의 농업에 대한 투자 증가율이 18.6%였던 데 반하여, 공업에 대한 투자증가율은 59%였던 점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산업간 불균형은 더욱 커졌다. 또한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급격히 전환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자본가들이 피해를 입었고, 이는 경제적 침체로 이어졌다. 더욱이 원료 및 부품 부족으로 공장들은 생산능력의 30∼50%만 가동될 수 있었기에 그 침체의 정도는 더욱 심하였다. 결국, 1976∼80년간 공업생산은 연평균 0.6% 증가에 그치고 말았다. 국가 전체적으로 국민소득 증가율은 연평균 0.4%에 불과하였다.


 








식민지시대부터 있었던 컨티넨탈 호텔의 야경
(필자 사진, 2003)


 이러한 1970년대 후반 경제적 침체는, 1945년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한 이후 1946-54년간 프랑스와의 전쟁 및 1954년 분단된 이후 남북 베트남 간 전쟁 등 오랫동안의 전쟁으로 인한 피해, 남부를 급격히 사회주의경제체제로 전환하려는 것에 대한 남부 사람들의 저항, 사회주의 경제체제 자체의 비효율성, 1978년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응하여 서구 각국이 내린 베트남에 대한 경제제재조치 등이 낳은 결과다.

이로 인하여 베트남 국민들은 식량조차도 부족한 상황에 처하였다. 그 당시 도시 거주 인구에 식량을 매달 13kg씩 배급하였는데, 식량사정이 악화되자 그 가운데 쌀의 양을 줄이고 타피오카나 고구마, 옥수수 등으로 채우기도 하였고, 배급량 자체를 줄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설탕이 부족하여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제대로 만들 수 없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베트남의 통일 이후 바로 시행한 제2차 5개년 계획은 완전히 실패하였고, 이로써 베트남 정부는 개혁정책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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