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통일의 첫 번째 특징은 한쪽에 의한 일방적 흡수 통일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에 흡수되어 북베트남이 결정하는 방향에 따라 수동적으로 통합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방향은 남부의 북화(northernization), 즉 남부의 사회주의화였다.
두 번째 특징은 무력에 의한 통일이라는 점이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통해 이룬 통일이었기 때문에 한쪽은 승리자로, 나머지 한쪽은 패배자로서 통합되어야 했다. 따라서 승리자였던 북베트남이 점령군의 입장에서 남베트남을 지배하는 형태로 통합이 전개되어 나간다.
셋째, 북베트남은 통일의 주체로서,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없던 남베트남을 해방시켰다는 자부심과 함께 그동안 반(半)식민지적 현실에 안주했던 남베트남 주민들에 대해 강한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자부심과 불신감의 결합은 통합과정에서 남베트남 주민을 철저히 배제시키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러한 통일의 특징은 정치통합 과정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당시 북베트남의 헌법에 따르면, 국회(당시의 명칭은 최고인민회의)가 국가의 최고 권력기관이었으므로 통일과 통합에 대한 합법성은 공식적으로 국회에 의해서 부여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총선을 통해 국회를 구성하는 것이 정치 통합의 핵심이었다. 이를 위해 1975년 11월 남북 대표단 간의 정치협상회의가 개최되었다. 협상이라기보다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이미 결정되었던 사항을 국민 앞에 협상의 형식을 통해 확인하는 작업에 불과했지만, 이런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 것은 비록 실체는 점령에 의한 일방적 흡수통일이라 하더라도 공식적인 통일은 상호 동의의 형태를 갖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회의 결과, 주요 합의사항으로 이듬해인 1976년 4월 25일에 총선을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국회를 구성한다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예정대로 1976년 4월 25일 총선이 실시되어 605명이 후보로 나서고 이 가운데 492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다. 전체 492석 가운데 북부가 249석, 남부는 243석을 얻어 북부가 과반수를 조금 넘었다. 당시 북의 인구가 2천4백만, 남의 인구가 2천만이었으므로 남북 인구수에 맞추어 균형을 맞춘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의원들의 성분을 보면 노동자, 농민, 종교지도자, 지식인, 군인, 소수민족 대표 등 거의 모든 계층이 이상하리만큼 골고루 선출되었다. 또한 492명의 대의원 가운데 공산당원의 수는 141명에 불과했다. 이는 국회가 공산당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계층을 고르게 대표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6월 24일 통일 후 첫 국회가 개최되어 통일 베트남의 국호를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할 것과 북베트남의 국기와 국가를 계속 사용하며, 하노이를 수도로 하고 사이공을 호찌민시로 이름을 바꿀 것 등을 의결하고 정부 각료를 인선한 후 회기 마지막 날인 7월 2일 통일 선포를 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이렇게 하여 공식적으로 통일 베트남, 즉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국회가 구성된 후에도 통일헌법을 제정하지 않고 북베트남의 헌법을 그대로 계승했다는 사실에서 통일이 새로운 국가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체제 내로 흡수하는 것이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총선 후 구성된 국회도 통일 국가의 첫 번째 국회가 아니라 종전 북베트남의 국회 회기에 연결되어 제6기 국회로 간주되었다.
정연식(창원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3) 정치통합과 문제점 : 국회와 헌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