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이후 주민 기초소비품의 국가공급제가 붕괴된 뒤 급속하게 진행된 사적 영역의 시장화와 그에 뒤따른 새로운 경제관리체계 등과 같은 국가적 조치가 시행된 결과로 현재 북한의 사회적 불평등체계는 기존의 정치적 신분 불평등체계와, 시장화에 따른 새로운 경제적 불평등체계가 착종되어 있는 이중적 불평등체계라는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탈북자 면접조사자료 분석에 비춰볼 때, 1990년대 후반 이후 주민 일상생활이 시장에 의해 실질적으로 포섭되는 과정에서 출신성분이나 토대라는 귀속적 요인과 이와 연관된 가족의 가용자원이라는 구조화된 초기조건 변수들이 개인의 시장적응능력과 결합해서 경제적 불평등체계 내의 개인의 위치를 결정하는 데 미친 영향은 경제적 계층별로 차이가 났다. 경제적 하층으로 내려갈수록 가족의 생계를 공식 직업과 연관성이 별로 없는 사적 부업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지는데 반해, 경제적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공식 직업과 이와 연관된 사적 부업을 통해 개인재산의 증식과 은폐된 방식의 사적 자본축적을 꾀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결국 기존의 정치적 신분 불평등체계 내에서 가족의 토대 상 내세울 게 없는 ‘기본군중’과 그 이하 군중범주에 속하는 대다수 가구들이 시장화 과정에서 경제적 하층으로 일종의 ‘수평이동’을 한 셈이다.
반면에 이들 가운데 개인의 시장적응능력이 뛰어난 소수 가족을 포함해서 토대가 ‘좋은’ 가족일수록 경제적 중·상층으로 진입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즉 새로운 경제적 불평등체계 내에서 대다수 개인이나 가족의 계층적 위치는 대체로 정치적 신분 불평등체계 내의 정치적·경제적 자원의 불평등한 배분구조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 이는 시장화의 진척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정치적 신분체계의 안정적 재생산에 기여해 온 구조화된 초기조건 변수들의 규정력이 여전히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정치적 신분 불평등체계가 급진적인 내적 변화를 수반하지 않고, 시장에 연계된 경제적 불평등체계에 맞물려 들어갔다는 데에서, 1990년대 중후반에 절정에 달했던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 정치적 통제의 상당한 이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지배체제가 심각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한 가지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맞물림 과정은 개인이나 가족의 생계유지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기 때문에 이들의 사회적 정체성이 재형성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 정치적 신분 불평등체계의 안정적 재생산기제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외견상 뚜렷하게 포착되지 않는 이런 이중적 불평등체계의 형성과 착종과정에서 연유하는 것이지만, 현 국면에서 기존의 정치적 신분에 기초한 지배권력구조에 대해 경제적 불평등체계의 시장적 권력관계는 종속적 위치에 놓여 있다. 그렇지만 입당이나 간부사업, 또는 시장화에 수반되는 소비주의 실천 양태 등 주민들의 사회적 정체성의 재형성에 영향을 미친 주요한 계층적 차별화 생성/결과 요인들의 작용을 검토해 보면 정치적 신분 불평등체계가 내적으로 적지 않게 이완되거나 침식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경제적 하층가구의 경우 시장적 관계에 의탁해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정치적 신분의 자각적인 차별화 의식에 기초해서 이루어졌던 위로부터의 정치적 동원은 실질적인 효과를 대체로 상실했다. 입당 등을 통해 정치적 신분 불평등체계 내의 지위 상승을 꾀하는 일부 하층가구도, 비록 실현 가능성은 적지만, 개인(가족)의 사적 이익실현을 위한 수단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정치적 신분 지배질서에 접근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경제적 하층가구에 대한 정치적 신분 불평등체계의 구속력은 상당히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 중·상층가구의 경우 정치적 신분 불평등체계에 연루된 정치적 사유로 인해 배제된 소수 가족을 제외하고는 개인재산 증식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간부사업에 적극적인 경향을 보인다. 특히 경제적 교섭력이 막강한 돈주들은 핵심적 권력기관 간부들과 공생적 협력관계를 구축하거나 이들을 자신의 사업에 직접 참여시키는 방식을 동원하여 기존 정치적 신분 불평등체계 내에서 정치적 보호막을 만들고 현행 제도적 틀 안에서 은밀하게 사적 자본축적을 ‘합법화’하려고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경제적 (중)상층가구는 상당한 경제적 교섭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존 지배권력과의 관계에서 종속적 위치에 놓여 있다. 따라서 정치적 신분 불평등체계 내의 기득권층에 속하는 일부 중간간부층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경제적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시장적 이해관계의 실현을 위해 반(反)시장적 정치적 지배관계에 의존하려고 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들의 사회적 정체성은 기존 불평등체계의 구속력을 상당히 강하게 받는 가운데 타협적으로 재형성되고 있다. 즉 정치적 신분 지배질서에 의존하면서 이를 수단적 공간으로 이용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시장적 권력관계에 의한 정치적 신분 지배질서의 침식효과는 소극적이다.
정치적 신분 불평등체계와는 별개로 경제적 불평등체계 내 계층별 가구들의 사회적 정체성 재형성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다른 요인으로 차별화된 소비주의 실천 문제를 고려할 수 있다. 경제적 하층가구의 경우 가처분소득의 한계로 인해 개별화된 소비욕구의 충족 가능성이 불안정하고 제약된다는 점에서 저급한 소비주의 실천이 이들의 사회적 정체성의 재형성에 미치는 효과는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왜냐하면 시장에서의 경쟁 격화에 따라 이들이 소비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더욱 취약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국가가 이들을 단기적이나마 정치적·경제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적 하층가구의 경우에도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최하층가구를 제외하고 계층적 위치에 관계없이 전체적으로 개별가구들이 경쟁적으로 소비주의 실천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새로운 권력자원과 권위의 원천으로서 시장적 관계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경제적 중·상층가구의 경우 경제적 불평등체계 내의 경제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그리고 개인재산 증식수단 차원에서 고급 소비주의를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런 소비주의 실천을 위한 물질적 여유도 일정하게 예비되어 있다는 점에서 경제적 하층과 달리 새로운 경제적 지위의 위계체계가 이들의 사회적 정체성 재형성에 미치는 영향력은 상당히 강력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돈주들이 세련된 외식문화와 같은 차별화된 고급 소비양식을 권력기관의 간부층과 공유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경제적 지위를 정치적 신분 불평등체계 내에 융화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경제적 불평등체계에 기반을 둔 차별화된 소비주의 실천은 정치적 신분 불평등체계의 지배권력과 직접적인 대립각을 세우지 않으면서 이를 침식하는 데 상당히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다가 개별가구들에 대한 정치적 신분 불평등체계의 구속력은, 개별가구들이 정치적 신분 불평등체계 내의 지위 획득을 자기들의 사적 또는 시장적 이해관계의 실현을 위한 수단적 공간으로 활용하려는 하는 차원에서만 유효하다는 점을 중첩시키게 되면 시장화를 매개로 한 경제적 불평등체계의 작용에 의한 기존 정치적 지배구조의 침식효과는 좀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중적 불평등체계와 연계된 주민들의 사회적 정체성의 재형성과정에서 시사받을 수 있는 것은 이런 침식이 완만하고 비급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정치적 신분 불평등체계를 수단적 차원에서 수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짐으로써 그 내부로부터 이완시키고 부식해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북한체제의 변화 전망과 관련해서 볼 때 지배권력으로서도 이를 효과적으로 차단하기가 어렵다는 점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 주요내용 : 이중적 불평등체계 형성과 주민의식 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