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현상이 증가하면서 ‘꽃제비’에 대한 기사가 종종 실리고, 이따금씩 ‘꽃제비’를 심층 취재한 기획물도 TV를 통해 방영되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 ‘꽃제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 ‘꽃제비’가 얼마나 있는지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한 때는 중국 내의 구호단체들이 앞다투어 ‘꽃제비’를 서로 데려가려고 한 적이 있다. 많이 수용할수록 국제기구 및 단체로부터 지원을 많이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제는 단속이 강화되고 탈북동포에 대한 신고 포상금이 실시되면서 흔히 볼 수 있던 ‘꽃제비’조차 중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줄어들기 시작한 ‘꽃제비’가 최근 북한 사회에 다시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북한 사정이 악화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름만은 예쁜 ‘꽃제비’란 원래 북한에서 유래된 말로, 장마당이나 역전 등을 헤매 다니며 음식을 구걸하거나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는 어린이들을 가리켜 ‘꽃제비’라고 불러 왔다. 그리고 중국으로 도강해 돈이나 음식을 빌어먹는 아이들도 흔히 ‘꽃제비’로 불러 왔다.



중국으로 도강해 온 아이들은 대부분이 10세 이상의 남자 어린이들이 대부분이며, 그 중에서도 15세 이상인 청소년들이 월등히 많다. 그런데 겉보기에는 모두 10∼12세 정도의 키와 체격을 하고 있을 정도로 왜소하다. 10여 년 동안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자랐기 때문이다. 또 ‘꽃제비’ 가운데 부모가 모두 사망하여 없거나 어느 한 쪽이 사망하여 없는 경우가 보통이다.



식량난이 악화된 1990년대 말에 실시한 민간단체의 조사에 의하면, 150여 명의 ‘꽃제비’ 중 22%는 양친이 사망했고, 부모 중 한쪽이 사망한 경우는 38%, 부모가 모두 생존한 경우라도 양친 모두 질병을 앓는 경우는 26%로 나타났다. 또한 가족들 중에서 형제(특히, 어린 동생)가 죽은 경우가 15%, 영양실조에 있거나 ‘꽃제비’로 떠돌고 있는 경우는 46%였다.



이들은 중국에 와서도 하루에 세 끼 밥을 챙겨 먹지 못하고, 돈이나 먹을 것을 구걸하여 한 끼나 두 끼를 겨우 먹고살고 있다, 이들은 중국 사람보다는 한국인 등 외국인이 더 잘 도와 주기 때문에 그들이 잘 드나드는 고급 식당이나 노래방, 호텔, 비행장 등을 자주 찾아다니며 밤에는 아무 데서나 되는 대로 자고 있다. 겨우 걸친 옷도 제대로 빨아 입지 못해서 늘 지저분하고 몸에서는 악취가 나며 피부병을 앓는 아이들이 많다.



‘꽃제비’ 아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편히 쉬는 곳을 마련하는 일이다. 마땅히 잠잘 곳이 없는 ‘꽃제비’들은 한겨울에 추위를 이겨내며 밤을 지내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꽃제비’들 대부분은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여건이 마련된다면 계속 공부를 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자신들이 구걸하기 위해 길거리를 배회하는 시간에 책가방을 메고 학교를 오가는 또래 아이들을 몹시 부러워한다. 그리고 몇몇의 ‘꽃제비’들은 형편만 나아지면 북한으로 돌아가 조선인민군대의 ‘군인’이 되고 싶어한다. 그만큼 북한체제가 심어놓은 영향력은 타국 땅의 ‘꽃제비’ 생활이란 참담한 환경 속에서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꽃제비’들이 고향 생각, 가족 생각 할 때마다 부르는 노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기러기떼 나르네]이다. 이 가사 속에 ‘꽃제비’의 심정이 실려질 때를 상상하면 마음이 미어짐을 막을 길 없다.





봄노을 피는 저 하늘가에 기럭 기러기 줄지어나네

서로 다정히 찾고 부르며 나의 마음도 싣고서 가네

보고싶은 고향에 가고 싶은 조국에

아 내 마음 기러기 끼르륵 끼르륵 가네



눈을 감아도 그리운 고향 푸른 언덕이 어리여오네

타향 만리길 바래워주던 나의 어머니 안녕하신지

보고싶은 고향에 가고싶은 조국에

아 내 마음 기러기 끼르륵 끼르륵 가네



해빛 따사론 보금자리로 기럭 기러기 찾아서 가네

조국의 노래 함께 부르며 정든 그 품에 나도 안기리

보고싶은 고향에 가고싶은 조국에

아 내 마음 기러기 끼르륵 끼르륵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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