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1월 분단독일의 상징인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7월 양독간 통화, 경제, 사회통합에 관한 조약을 맺은 이후 1990년 10월 3일 공식적으로 독일 통일이 이루어졌다. 독일 통일은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냉전대치 상황이 심각했던 1960년대 브란트의 동방정책에서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특히 비정치분야 조약체결을 통한 접촉확대(1974-89년)에 힘입어 통일 이전부터 동서독간의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그 결과 동독인들 사이에 이미 부와 자유에 대한 동경심이 강했고, 1980년대 후반기 동유럽에 개방 개혁의 바람이 불면서 동독 주민들의 정치현실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동서독 간에는 분단된 상태에서도 해마다 수 만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넘어갔는데, 이러한 동독 이탈현상은 경제적 우위에서 비롯된 서독의 유연하고 적극적인 통일정책의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흔히 통일 독일과 남북한의 비교에서는 정치적 현실이나 통일비용 문제만 지적될 뿐,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은 간과되고 있다. 그러나 서독정부는 동독정부와의 화해정책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인권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보호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견지하였다. 서독정부는 열악한 상태에 있는 동독 주민의 인권 조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다양한 정치외교적 노력을 경주하였는데, 서독 내에서는 기본법을 통하여, 동서독 간에는 통일조약으로, 대외적으로는 유엔기구들과(인권조항이 삽입되어 있는) 헬싱키 협정(동독을 포함한 동구권 국가들은 1975년 8월 조인함)을 통한 일관되고 지속적인 정치외교적 노력이 그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1963년 이래 서독 연방정보부(BND)는 동독정부와의 비밀거래를 통한 정치범 석방(총 3만 2천여 명에 달아하는 정치범들을 1인당 수 천만 원씩 동독에게 지불하고 서독으로 이주시킴), 이산가족 재회, 그리고 동독을 탈출하려다 잡힌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서독 행을 추진하기 위해 동독정부에 막대한 돈과 물자를 제공하였다. 그 결과 동서독 통합이 이루어진 1989년까지 30만 명의 동독주민에게 자유를 찾아주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우리 정부가 과거 국내 입국 탈북자들을 귀순용사라 하여 기자회견이나 강연회를 통해 신분을 밝히고 북한체제의 열등함을 증언하게 한 것과는 달리) 이들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고 평범한 서독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989년 8월 8일 131명이 동 베를린 주재 서독대표부에 진입하여 서독 행을 요구했던 것을 시발점으로 연일 동독인들의 탈출러시가 계획되고 조직화되어 헝가리, 폴란드, 체코 주재 서독 대사관으로 확산되어갔다. 특히 1989년 8월 19일 헝가리 민주단체와 범유럽 유니온이 주최한 행사에 참석했던 600여 명의 동독 젊은이들이 오스트리아로 탈출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헝가리 정부는 대 오스트리아 국경을 통제하고 있었으나 8월 19일 당일 행사를 위해 3시간 정도 국경을 개방하였고 이때 동독 젊은이들이 탈출한 것이다. 이후 헝가리 정부는 사회주의 동맹국으로서 공동운명체였던 동독정권의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서독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 오스트리아 국경개방 결정을 내렸고 그 결과 불과 두 달 만에 2만 명이 넘는 동독인들이 이 국경을 통해 서독으로 탈출하게 되었다. 물론 이 일은 서독정부가 헝가리정부에 경협차관을 제공함으로써 헝가리 국경개방을 유도한 요인이 컸지만 인권과 인도주의 입장에 따른 헝가리 정부의 결정도 높이 평가할 만 하다.



한편, 체코 프라하 주재 서독 대사관에 진입했던 6,000여 명의 동독인들은 서독에서 파견한 특별열차 편으로 동독 땅을 경유하여 서독 행에 성공했다. 이렇듯 동독인들의 탈출이 이어지자 동독공산당은 주민들의 외국여행을 금지시키고 탈출자에 대한 발포명령까지 내렸지만, 그 해 8월부터 11월까지 20여만 명의 동독 난민들이 동유럽 서독 공관에 쇄도하였다.



그 결과 동독 내에서 사회주의 통치 이데올로기의 정통성이 흔들리고 전국적으로 당과 정권에 대한 반대시위가 확산되어 갔으며 이로 말미암아 18년간 동독을 지배했던 당서기장 E. 호네커가 그 해 10월 사임하였고 동독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한꺼번에 수 십만 명의 동독이탈자가 서독으로 넘어오면서 동독의 몰락이 객관적으로 입증되고 있던 시기에도 서독에서는 ‘동독붕괴설’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자제하였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하면 독일통일 과정에서 동독난민들은 통일의 물꼬를 튼 역할을 했는데 이러한 결과는 인권과 자유라고 하는 인류보편적 가치를 중시한 서독정부의 동독 난민들에 대한 매우 과감하고 적극적인 지원과 배려 및 이에 따른 인접 국가들의 협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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