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의 큰물 피해로 시작한 북한의 식량난은 특히 참혹한 영양실조 상태인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외부에 알려졌다. 1998년 8∼9월 사이에 WFP, UNICEF와 EU(유럽연합)이 북한당국과 공동으로 생후 6개월에서 7세 사이 어린이들의 영양 상태와 성장발육에 대한 무작위 표본 조사를 했다. 북한 기근과 관련된 가장 의미있는 전국규모의 통계조사였다. 그 결과 전체 어린이의 60%가 만성영양부족으로 인한 발육부진 상태이고, 12개월∼24개월 사이의 어린이가 이유식 부족으로 인한 영양실조, 12개월 이하의 젖먹이 중 18%가 산모의 영양부족으로 인한 영양실조로 나타났다. 이 정도 상황이면 높은 질병률과 사망률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통계는 의도하지 않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북쪽 어린이들의 전국적 평균 신장을 남쪽과 비교해보니 7세를 기준으로 이미 12cm의 차이가 났다. 이후 성장기의 획기적인 영양 공급이 없으면 사춘기에 이르러서는 20cm까지도 벌어질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국제기구의 자료들은 북한 기근의 규모가 엄청나게 크고 전 인구 층에 확산될 정도로 “넓으며”, 외부세계와 차단된 상황에서 “조용하게” 시시각각 그 상처가 “깊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통제된 사회주의 국가에서 기근은 엄청난 규모의 피해를 입혔지만 체제 자체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그만큼의 큰 희생에도 불구하고 끄떡없이 유지된 북한체제는 그 체제가 내외에 발신하는 이미지 때문에 더욱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영양실조로 뼈만 남은 아이들 사진과 대조되는 예쁜 옷을 입은 유치원 아이들, 큰 운동장을 꽉 메운 수 만 명 어린이들의 활기찬 매스게임 광경과 충돌하는 장마당 꽃제비의 충격적 다큐멘터리가 북한의 기근을 바라보는 우리 시각을 혼란스럽게 한다. 어느 쪽이 사실인가? 기근은 있는가, 없는가? 그러나 이렇게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현상들이 모두 공존하는 것이 북한 사회의 현실인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배급체제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대기근이나 전쟁과 같은 비상 시기에는 국가가 통제하는 모든 식량배급은 오히려 더욱 철저하게 사회적 지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한다. 즉, 주요 군사 요원과 관료,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의 주민들에게 먼저 공급된다. 국가에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사람들과 그 가족을 우선 보호하고자 하는 정책인 것이다. 따라서 준전시 체제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의 경우 식량 사정이 악화될수록 외부의 이목이 집중되는 평양과 같은 주요 도시에 자원을 집중함으로써 주변부 지방과의 생존 조건의 차이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같은 논리로 한 지역 안에서도 개인의 상대적 중요성에 따라 제한된 식량은 더욱 큰 격차로 불평등 분배되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에 중국으로 탈북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배급체제의 주변부에 있는 변방의 광부, 노동자, 농민들이었다. 최근에는 징계 등의 사유로 생존 범위에서 밀려났거나 밀려날 위기에 처한 당원, 전문가, 지식인들도 늘어나고 있다. 탈북자의 발생은 그만큼 북한 사회의 전체적 식량사정 및 배급체제의 운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탈북 아동과 청소년들의 대부분은 가족 중에 기근과 질병으로 희생된 사람이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먼저 희생이 되었다고 한다. 손자들을 먹이기 위해 스스로 식량을 줄이다가 죽어갔다는 것이다. 1995년의 큰물 피해 이전부터 이미 식량배급이 유명무실해진 지역 출신이 대부분이다. 에너지 부족으로 공장이 가동되지 못한 함흥 같은 공업지역의 노동자들과 함경북도의 여러 광산지역의 아이들이 많다. 공적인 경제체제가 거의 붕괴 상태에 이르자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무력하게 되었다고 한다.
많은 아이들의 전형적인 표현으로는 자포자기한 아버지들이 더욱 술과 담배에 매달리다 병들었고 어머니는 암시장에서 장사를 하거나 식량을 구하려고 멀리 다녔다고 한다. 부모중 하나 혹은 모두가 죽거나 집을 떠났다고 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기근으로 인한 가족파괴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폭 넓게 나타났다. 이러한 한계 상황에서 어린 아이들, 특히 청소년들은 가족들의 식량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집을 나와 떠돌게 되었다고 한다. 이른바 꽃제비가 된 것이다.
물론 모든 북한 아이들이 꽃제비가 된 것은 아니다. 탈북한 아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한 국경 도시의 경우 가장 기근이 혹심했던 1998년에도 학교는 대부분 열렸지만 많은 학생들이 출석을 못했다고 한다. 교사들도 식량을 구하는 일에 각자 바빠서 학교는 명목상 유지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한 학급에 1/4 정도 되는 여유있는 집(당 간부집이나, 외국에 친척이 있는 집 등) 아이들은 도시락을 싸와서 수험 준비를 했다고 한다. 다른 1/4 정도는 점심을 굶어도 하루 종일 학교에 있었고, 또 다른 1/4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의 어린 시절 등 중요한 아침 수업만 하고 도망치고, 남은 1/4은 아예 학교에 안 나오는데 그 아이들 중에는 기근으로 이미 희생이 된 아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기근으로 인한 피해는 흔히 상상하듯 평등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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