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 출신의 한 탈북 청소년이 죽었다. 이름은 김철. 열아홉살이었다. 죽은 곳은 제주도. 한적한 6차선 대로변, 전봇대를 들이받은 마운틴 바이크형 오토바이가 어처구니없는 사고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남한에 온 지 꼭 1년 반 만인 2003년 1월 13일이었다.



“우리 때문에 죽었어요. 우리가 죽였어요.” 탈북 청소년들을 성심으로 지도해주던 남한의 한 여선생님이 장례식장에서 흐느끼며 말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넥타이 양복차림의 앳된 소년의 사진을 쳐다보며 중국에서 함께 떠돌던 동무들이 몸부림치며 넋두리를 한다. “이 새끼야 두만강 넘어오다 빠졌을 때 그때 죽지 왜 지금 죽니?” “보위부 수용소에서 며칠 못 먹고 온 몸이 피멍이 들게 맞아 축 늘어져 있었을 때 거기서 죽지 왜 여기서 죽니?”



철이는 15살 때부터 한 살 위 사촌형과 고향을 떠나 중국 각지를 헤매고 다녔다. 그 후 몇 차례 국경을 넘나들다 잡혀서 고생도 했고, 남한에 오기 전에는 부모님들께 마지막으로 돈이나 전해 준다고 중국 심양에서 원산 고향집까지 갔다가 차마 남조선으로 간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떠나왔다고 한다. 바로 재작년 봄의 일이었다.



남한 사회는 철이에게 많은 것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한라산이 보이는 13평 임대 아파트, 냉장고, 칼라TV, 비디오, 침대, 최신형 컴퓨터, 그리고 마지막으로 철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오토바이까지 모두 혼자 “자기 것으로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적 풍요와 함께 외로움과 소외, 경쟁과 차별 같은, 이전에는 사치로만 알았던 새로운 심리적 억압과 공포를 경험하게 되었다.



남한 사회는 남한 사회의 방식대로 꼭 그 수준만큼 철이를 위해 주었다. 철이는 함께 온 사촌 형제를 부산과 제주로 따로 따로 배치한 무심한 정책집행과 19세 청년을 북쪽에서의 최종 학력에 맞춰 초등학교 6학년으로 편입하라고 하는 기계적 학벌주의에 묶여 늘 답답해하였다. 처음엔 귀순용사처럼 환영하면서 양복도 맞춰주고 롯데월드와 63빌딩을 구경시키며 남한의 중산층 이상의 삶이 가능할 것 같이 여기게 해놓고 결국은 이 사회의 영세민으로 업신여김을 당하게 될까봐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남한 사회의 배려와 온정도 탈북자들의 삶을 시들고 피폐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매주 자기 교회에 나와 출석을 부르면 한 달에 20만원을 주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경쟁적으로 50만원을 주는 교파도 있다. 그나마 많은 교인들 앞에서 북에서 못 먹고 못 입던 이야기, 떠돌며 빌어먹던 이야기, 이렇게 살려주셔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모멸감을 참으며 신앙간증으로 되풀이해야만 했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려고 학원에 가 봐도 생소한 지식만 물어보는 이상하게 꼬인 시험문제들만 풀어야 했고, 이상한 억양으로 말한다고 놀리며 왕따시키는 철없는 남한 아이들을 대해야 했다. 그나마 시간당 2,000원의 주유소 일이나 신나게 오토바이를 탈 수 있는 배달 일을 하면서 만난 남한의 이른바 폭주족이나 불량청소년들과는 자주 대판 싸우기는 해도 서로 비슷한 절망감과 답답한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철이는 죽었다. 자살 같은 죽음이라고 했다. 텅 빈 철이의 아파트 방벽에는 154cm의 19세 청년이 매일 자기 키를 대보던 어린이용 키재기 줄자와 하나원의 하나둘학교에서 함께 있던 탈북한 친구들이 서로 앞날을 기약하며 써준 글과 사진이 붙어 있었다. 철이의 장례식장은 각급 기관장들이 보낸 화려한 국화 화환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철이의 죽음은 탈북자에 대한 남한 사회의 인식혼란과 상호 모순적 대응방식, 그리고 그 영향으로 탈북자 스스로가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문화충격이 빚은 비극적 결과를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다. 철이는 짧은 기간에 너무도 극적인 환경변화와 정체성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극심한 기근을 겪고 있던 북한에서 집과 학교를 떠나 “꽃제비(거지)”로 떠돌다가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에서 법적으로는 “불법체류자”, “유랑민”이 되었고, 이들을 “인도적 난민” 혹은 “식량난민”으로 여기고 구호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에 의해 비밀고아원에서 보호를 받으며 성경공부를 하였다. 남한으로 가기를 결심하고 여러 나라의 국경을 넘으며 “망명자”가 되었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하자 “북한이탈 귀순동포”가 되어 귀순용사들처럼 양복을 입고 서울의 화려한 곳들을 돌아보았다. 통일부 하나원에서는 “북한이탈주민”으로 교육받고 꿈에도 만져보지 못했던 액수의 정착금을 받아 한 순간에 부자가 된 것 같았지만, 영구임대주택의 “영세민”이 되어 “생활보호대상자”들이 받는 생활비를 받게 되었다. 교회에서는 자주 신앙간증을 하는 “특별한 교인”이지만, 학교를 못 가는 “탈학교 청소년”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밤에는 오토바이를 타는 “폭주족”이 되었다.



이 모든 변화가 1-2년 안에 일어난 것이다. 한 개인이 자신의 지식과 체험을 통해 환경변화의 의미를 인식하고 이에 적절히 대응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리만큼 어려운 과정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자신에 대한 주변의 인식이 혼란한 상태에 있거나 서로 다른 기대를 갖고 상호 모순되는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면 그러한 상황에 대한 적응은 더욱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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