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릉의 발굴 >
1993년 북한은 평양시 강동구 강동읍 문흥리에 있는 대박산(大朴山) 동남쪽 경사면 기슭에서 ‘단군릉(‘檀君陵)’을 발굴하였다고 발표하였다.
 
< 발굴당시의 단군릉 >
그런데 무엇보다 충격적인 보고는 무덤 안에서 남녀 한 사람씩의 뼈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단군의 유해라고 주장한 것이다. 즉 ‘전자상자성공명년대측정(ESR)’ 방식에 의해 감정한 결과, 인골의 연대는 5,011±267년전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단군은 기원전 3,000년전에 실재한 인물이었고, 또 그는 당시 평양지역을 도읍지로 하여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는 것이다.
 
< 단군릉 >
그러나 발굴한 무덤은 고구려 양식의 돌칸흙무덤(봉토석실분 封土石室墳)이었다. 그리고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관의 세움장식과 돌림띠조각 각 1점, 금동띠 쪽 1점과 관쇠못 6개 등이 있었는데, 이 역시 고구려 계통의 유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인골과 무덤사이에 이렇게 시차가 생긴 것은, 인골만은 원래 그대로의 것이지만, 무덤과 유물들은 고조선의 후계로 자처하고 있는 고구려에서 개축.개장(改葬)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후 북한에서는 이 단군릉을 고구려 장군총을 모방하여 밑변 각각 50m, 높이 22m의 거대한 규모로 개건하는 사업을 벌이면서, 그 진위 여부를 떠나 국가적 차원에서 단군릉을 고조선역사의 상징물로 과시하고 있다.
 
< 단군릉 원경 >
 
<단군릉의 진위>
이렇게 최근 북한에서 발굴하고 개건한 단군릉은 이미 여러 역사 기록에 단군릉으로 전해지고 있는 무덤이었다. 평양의 단군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로서, 고구려본기 동천왕조에 “평양은 선인(仙人) 왕검(王儉)이 살던 곳이다“라고 하였다. 또『삼국유사』고조선조에는 단군 왕검이 평양에 도읍하여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는 기사를 전하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평양에 단군묘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는데, 이와 함께 단군릉의 존재가 등장하고 있다. 중종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하여, 허목의 『동사(東史)』,『숙종실록』『정조실록』 등등에 평양 동쪽에 단군릉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능지기를 정하여 수리하고 제사지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실제 근대에 들어 이광수가 ‘단군릉’ 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 무덤과 단군의 의미를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현진건도 1932년에 기자 생활을 하다 단군성적 순례를 하는데, 이 무덤을 참배하였다는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단군릉에 관한 전승은 어디까지나 고려, 조선시대 이래의 전승일 뿐, 그것이 단군릉이라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 단군의 유골 >
단군릉의 발굴 결과에 대해서도 많은 학자들이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먼저 단군릉출토 인골의 절대 연대를 측정한 전자상자성공명법은 주로 10만년전 이전의 구석기시대 유적에 대해 응용될 수 있는 방법으로 고작 몇 천년 전의 연대를 측정하는 데에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설사 인골이 5천년전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무덤이 단군의 무덤이라는 근거는 역시 없는 셈이다.


현재 북한에서는 구석기시대 초기 이래 고대시기에 걸쳐 평양 중심의 대동강 유역이 인류와 고대문명 발상지의 하나를 이루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대동강문화’로 이름지어 부른다. 물론 여기에는 평양을 민족사의 중심 도시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단군릉의 발굴과 복원은 이러한 작업의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다.
 
<고조선의 위치>
그러면 과연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처음 평양일대에서 건국되었는가? 사실 그동안 고조선의 위치, 그 중에서도 처음 국가로 성립된 곳이 어디냐 하는 문제를 놓고 논란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단군신화와 연결되는 곰다리장식(낙랑시대/평양출토)>
현재 학계에 제시되어 있는 설로는 크게 평양설, 요동설, 이동설이 있다. 고조선 후기의 위치로 볼 때 평양이 중심인 것은 거의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이전 고조선의 활동 범위를 고려하면 평양설의 한계가 적지 않다. 요동설은 평양설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되었는데, 신채호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견해를 계승하여 문헌기록은 물론 요령지역의 고고문화의 성과에 따라 많은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다. 일찍이 북한학계에서도 평양설이 제기되었다가, 1960년대 중반에 이지린의 주장을 정설로 한 후 줄곧 요령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다가 최근에 단군릉 발굴 이후 다시 평양설이 등장하여 평양이 단군조선의 시종일관한 도읍지였음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 루상무덤(요동지역) >
이동설은 평양설과 요령설의 장단점을 흡수한 견해로서 초기에는 고조선이 요동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다가, 후기에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중심지가 이동하였다는 입장이다. 현재로서는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견해로 학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직은 그 어느 주장도 확정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평양이 일찍부터 고조선 문화의 중요한 중심지의 하나였고, 고조선 후기에는 도읍지의 여부를 떠나서 정치적 비중과 문화적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동북아시아 역사의 전개에서 지속적으로 평양지역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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