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평양의 또다른 시조 인물이다. 중국 은나라 사람 기자(箕子)가 동으로 조선에 와서 교화를 이루었다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에게 자랑스러운 전승으로 믿어졌다. 그래서 평양에는 기자묘라고 전해지는 무덤과 기자가 실시 했다는 정전제(井田制)의 옛터로 전해오는 곳이 남아 있다. 그러면 평양은 단군 이후 새로이 기자가 등장하여 나라를 세우고, 그 뜻을 펼쳤던 곳인가?
 
< 기자묘 >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 >
기자동래설은 중국 은(殷)나라의 현인인 기자가 주(周)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빼앗자, BC 1122년 동쪽으로 조선에 들어와 기자조선을 건국하고, 팔조금법을 가르쳤다는 전승이다. 그리고 기원전 194년 위만에 의해 쫓겨난 조선의 준왕이 기자의 후예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기자동래설을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 기자가 조선에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면, 당대 중국 문화와 고조선의 문화 사이에 공통점이 적지 않을 터인데 그런 면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더구나 기자가 조선에 왔다는 이야기가 처음 등장하는 기록도 한(漢)나라 때가 처음이다.


기자에 관한 전승은 단편적이나마 중국의 선진(先秦)시대 문헌에서부터 보이고 있지만, 그가 조선으로 갔다는 서술은 보이지 않는다. 기자의 조선동래설을 전하는 최초의 문헌은 《상서대전 尙書大典》이다. 이에 의하면 기자는 무왕에 의해 감옥에서 석방되었지만, 고국인 은나라가 망하였으므로 차마 그곳에 있을 수 없어 조선으로 망명하였으며, 무왕이 그 소식을 듣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왕 13년에 기자가 주나라 왕실에 조근을 왔고, 이때에 무왕이 기자에게 홍범을 물었다고 기술하였다. 이후《한서》 지리지에서는 조선의 순후한 풍습은 기자가 팔조금법으로 교화시킨 결과라고 기술하였으며, 《위략》과《삼국지》 동이전에서는 기자 이후 그 자손이 40여대에 걸쳐 조선을 다스리다가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겨 마지막 왕인 준(準)이 삼한으로 건너갔다고 하였다. 그 뒤 기자와 기자조선에 대한 인식은 이상 《삼국지》단계의 전승을 기본으로 여러 윤색이 더해졌다.
 
<기자는 평양에 왔었나? >
이렇듯 기자동래설은 그 기록상의 변천을 보면 그리 신빙성을 갖는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면 기자동래설이 반영하는 역사상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그동안 여러 해석들이 제기되어 왔다


우선 기자동래설은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무관한 관념적인 기술에서 나왔다고 보기도 한다. 과거 중국인들이 그 주변의 민족이나 국가의 기원을 기술할 때, 이를 중국의 전설적 인물의 후예로 간주하는 중화의식에서 비롯한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또는 중국의 천문학에서 요동 고조선 방향이 기성(箕星)의 방위와 일치되는 것에서 점차 전승이 확대된 결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기자동래설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그 역사상을 달리 해석하는 견해가 적지 않다. 그 중의 하나가 기자란 특정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동이족의 하나인 기자족(箕子族)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기자족이 한반도로 이동한 결과 기자동래설이 나타났다고 본다. 이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지방에서 대동강유역으로 이동하였다는 이동설과 연관되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중국 고대문헌에 나타나는 동이(東夷)나 보다 구체적으로 한(韓), 맥(貊), 예(濊)의 이동과 관련지어 타당성이 주장되기도 한다.
 
<기자가 남긴 것들 >
기자동래설이나 기자조선이 역사적 사실로서는 부정되더라도 우리 조상들이 오랫동안 그것을 사실로 믿어왔다는 점은 가볍게 다룰 수 없는 문제이다.


고구려에서는 영성신(靈星神), 일신(日神), 가한신(可汗神)과 더불어 기자신(箕子神)을 섬긴다고 하였다. 그런데 낙랑지역 출신으로 중국으로 건너간 낙랑 왕씨 가문이 스스로 기자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다수의 묘지가 발견되었다. 여기서 유추하자면 고구려의 기자신은 본래 고구려의 신앙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평양일대에서 내려오던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기자신으로 추정되고 있다.
 
< 기자묘의 위치(해동지도) >
< 단군사당과 숭인전(기자사당)의 위치(해동지도) >
어찌 되었건 기자가 평양지역에 뿌리를 내렸다는 전승은 이미 고구려시대에 확정된 듯하다. 이후 평양 지역이 소외되었던 통일신라기에는 기자란 존재가 무시되었지만, 다시 고려시대에 들어서 점차 기자에 대한 인식이 퍼져나가게 되었다. 1102년(숙종 7) 평양에 기자 사당을 세웠고, 기자조선을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로 편입하였다. 고려말 《제왕운기》에서는 전조선(前朝鮮)의 시조로 단군을, 후조선(後朝鮮)의 시조로 기자를 나란히 노래하였다.


이후 조선의 사대부들은 유교적 정치이념에서 기자에 대한 숭배를 더욱 확대하였다. 성리학이 발달하고 도학정치의 이상이 추구되며 사림 정치의 확대와 짝하여, 절의와 인현의 인물이며 왕도정치를 구현한 성현으로서 기자에 대한 숭앙심은 고조되었다. 그에 따라 역사상 기자조선의 정통성도 강조되었다. 평양의 기자묘에 대한 숭배와 고구려 도시구획의 흔적을 기자가 행한 정전제로 본 인식들은 이를 상징하고 있다.
 
< 기자 정전제의 흔적으로 알려진 고구려 도시구역(평양성도) >
우리 역사에서 기자는 그 자체의 사실이 문제가 아니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하나의 역사적 관념이 만들어지면, 이로 인해 또다른 역사의 페이지들이 만들어지고 재생산된다는 점이다. 기자에 대한 역대의 인식들은 그런 가상의 페이지들의 형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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