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벽화무덤은 화려하고 다채로운 벽화가 온 무덤방을 구석구석 장식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거기에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주는 문자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무덤 주인공의 묘지를 기록하고 있는 무덤은 평양 지역에는 안악 3호분의 동수와 덕흥리고분의 유주자사 진이라는 두 예에 불과하다. 이들도 고구려인이라기보다는 중국인 망명객이므로 순수한 고구려인들은 전혀 무덤의 주인공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는 무얼까? 광개토왕비라는 걸출한 문자 기록을 남긴 고구려인이 왜 무덤에는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는지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어찌되었든 구체적인 명문은 남아있지 않더라도, 여러 전승을 참고하거나 혹은 고분의 구조나 벽화의 내용으로 그 시기를 추정해 보면, 몇몇 무덤은 그 주인공에 대한 실마리가 주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그 무덤의 주인공을 알게 되면 그 벽화의 내용은 더욱 생동감있게 역사 속에서 부활하게 된다.
 
< 동명왕릉 >
<동명왕릉>
평양부근 고구려 무덤 중에서 매장자가 전승되어 오고 있는 무덤으로는 동명왕릉과 한왕묘, 단군릉이 있다. 한왕묘는 황제묘라고도 하며, 동천왕릉이라고도 전하는데, 지금은 경신리 1호분이라고 부른다. 사실 동천왕이 평양지역에 묻힐 리 없으니, 이는 후대의 전승에 불과하다. 단군릉도 그 진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다.


동명왕릉은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옛 무진리)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 때부터 이 무덤이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무덤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이 무덤의 외부에는 조선시대 말기에 세워진 호석 . 정자각 . 홍살문 . 비각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일제시대와 1960년에 발굴조사되었으나 여전히 동명왕릉은 전설로만 간주되었다. 그러다가 1974년에 동명왕릉 일대에 대한 재발굴이 이루어져 이 동명왕릉이 장수왕 때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옮겨온 고분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미약한 편이다.


이 무덤은 평양 일대의 다른 석실봉토분과는 그 외형이 다르다. 규모가 한변의 길이 22m, 높이 8.15m로 매우 큰 것은 물론 봉분의 기단에 방형의 돌기단을 구축하고 봉분도 4각추형으로 구성하고 있다. 또 주변에 강자갈을 깐 묘역시설도 주목할 만하다. 이런 구조는 만주 국내 지역의 장군총의 요소를 계승하고 있는 면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석실봉토분이라는 점에서 장군총의 기단식 적석총과는 다르다. 즉 이 무덤은 장군총과 석실봉토분의 과도적인 형태로 보아도 좋다.
 
< 동명왕릉과 정릉사터 >
물론 무덤 앞에 정릉사라는 사찰이 마련된 것으로 보아 그 무덤의 주인공 동명왕은 아니더라도 왕릉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떤 왕이 여기에 묻힐 가능성이 높을까. 역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장수왕을 빼놓고는 어느 누구를 생각할 수 없다. 장수왕은 평양 시대를 연 인물로, 평양을 기준으로 본다면 시조와 같은 위상을 갖는다. 그러기에 고구려의 시조무덤으로 전해지다가 후대의 전승에서 동명왕릉으로 변한 것인지도 모른다. 동명왕릉이든 장수왕릉이든 간에, 이전의 양식과 새로운 양식을 두루 갖춘 이 무덤에는 과거의 전통을 기반으로 새로운 평양 시대를 열어가려는 고구려의 의지가 담겨있음은 틀림없다.
 
< 진파리 4호분 외경 >
<온달과 평강공주 무덤 >
1960년 북한에서 동명왕릉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을 때, 주변의 진파리 1호분과 진파리 4호분이 벽화분으로 판명되어 귀중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이 두 무덤은 동명왕릉 구역에 있으므로, 북한에서는 일단 왕실의 무덤으로 판단하면서, 이 두 무덤 주인공에 대해 색다른 견해를 밝히고 있다.


진파리 1호분은 6세기 경에 만들어진 외간 무덤으로, 사신도를 비롯해서 벽화 전체에 생동감이 넘쳐 자유 분방하고 극히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소나무 그림은 고구려 벽화 중 걸작에 속한다. 벽화 수준이나 동명왕릉에 인접해 있다는 점에서 최고의 인물로 볼 수 있겠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6세기 후반 무렵 활동한 인물로서 돌궐의 침입을 물리친 고흥 장군으로 추정하고 있다.
 
< 진파리 4호분 연못도 >
이웃한 진파리 4호분의 벽화 역시 만만치 않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무덤안길의 양벽에 그려진 연못으로 소나무들이 우거지고 바위와 절벽으로 둘러싸인 연못에 연꽃을 비롯한 각종 꽃이 화려하다. 더욱 북벽에는 현무도 대신에 용과 선녀 꽃그림을 그린 점이 독특하다. 이런 벽화의 내용으로 미루어 무덤의 주인공은 여성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6세기 경 왕실의 여성 인물로 평원왕의 공주와 그의 남편인 온달장군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런 북한의 주장은 좀 무리한 추정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상상력이 벽화의 감상에 생명력을 더하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면, 실증에서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여유로움도 필요하리라.
 
< 강서세무덤 >
<강서세무덤>
고구려인의 수준 높은 건축술과 뛰어난 벽화를 자랑하는 강서 세무덤은 7세기중엽의 벽화무덤이다.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 벌판에 대묘 . 중묘 . 소묘 세 무덤이 나란히 있으며, 동쪽으로 2km를 가면 덕흥리고분이, 서쪽으로 6km에는 수산리 벽화고분이 있다. 세 무덤 중 대묘와 중묘에는 벽화가 있으며, 그 사신도 그림이 고구려 벽화의 말미를 화려하게 장식한 최고의 걸작이다. 대묘와 중묘의 벽화 수준이나 석실의 크기로 볼 때, 이 세 무덤은 왕릉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세무덤이 나란히 있는 점에서 부자나 형제 등 혈연적으로 가장 가까운 세 인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 강서대묘의 청룡도 와 백호도>
이 세무덤의 주인공으로 가장 적절한 후보는 평원왕의 아들들인 영양왕(榮陽王) . 영류왕(榮留王: 武陽王) . 대양왕(大陽王)의 3형제들이다. 장남인 영양왕은 의당 왕위에 올랐지만, 후사가 없어 그가 죽은 후에는 동생 영류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리고 대양왕은 비록 왕위에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아들 보장왕이 왕위에 올라 왕으로 추존되었다. 즉 3형제가 모두 왕위에 오른 유일한 예이다.


그러면 세무덤은 각각 어느 왕에 비정할 수 있을까? 먼저 수양제의 침입을 격퇴한 불굴의 업적을 이룬 영양왕이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강서대묘의 주인공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 그러면 영류왕과 대양왕이 남는데, 벽화가 있는 중묘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그래도 실제 왕위에 오른 영류왕일까, 아니면 아들 왕의 덕을 본 대양왕일까. 쉽게 판단되지는 않지만, 연개소문에게 시해되어 도랑에 버려졌다는 영류왕이 화려하게 장식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겠다. 역시 중묘는 대양왕의 무덤으로, 벽화가 없는 소묘를 영류왕의 무덤으로 볼 만할 것이다.


앞서 몇몇 벽화무덤을 고구려왕의 왕릉으로 짐작해 보았지만, 여전히 문자왕 등 나머지 여러 왕들의 무덤들은 오리무중이다. 이렇듯 무덤에 자신의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고구려인들은 현세에 조금의 미련조차 완전히 버리고 떠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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