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의 풍수지리>
943년 고려 태조 왕건은 67세의 나이로 병석에 누워 죽기 직전에 측근인 박술희를 불러 후대의 왕들이 지켜야 할 10가지 요목을 받아 적게 하였다. 이를 ‘훈요십조(訓要十條)’라고 하는데, 일종의 나라를 다스릴 통치 지표에 해당하는 유언인 것이다. 그런데 이 10조에서 왕건은 서경에 대한 유훈도 잊지 않았다.


“ 나는 삼한의 산천 신령의 도움을 받아 왕업을 이루었다. 서경(평양)의 수덕(水德)은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을 이루고 있어 길이 대업을 누릴 만한 곳이니, 춘하추동 사시절의 중간 달(子, 午, 卯, 酉가 있는 해)마다 순수(巡狩)하여 100일을 머물러 태평을 이루게 하리라.”


왕건은 풍수지리의 입장에서 서경을 국가의 평안과 관련된 이상적인 공간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전통시대 내내 평양은 수덕(水德)이 우리나라에서 뛰어난 곳으로 여겨져 왔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도 ” 택리지(擇里志) ” 에서, “강가에서 살 만한 곳으로는 평양 외성을 팔도 중에서 첫째로 친다. 대개 평양은 앞뒤에 백리나 되는 들판이 탁 틔어서 명랑한 까닭에 기상이 크고 넓다. 산빛은 수려하며, 강은 급하게 쏟아지지 않고 천천히 앞면에서 출렁거린다. 산과 들이 어울리고, 또 들은 물과 어울려 평탄하고 수려하다. … 또한 지리의 아름다움을 상상할 수 있다. 전해 오는 말에는 ‘평양 지세는 물위로 배가 가는 형국이므로 우물 파는 것을 꺼린다. 예전에 우물을 팠더니 읍에 화재가 자주 일어나므로 드디어 메워 버렸다’고 한다. 온 읍에서 공사를 막론하고 모두 강물을 길어다 쓰고, 땔나무를 운반하는 길이 멀어서 땔나무가 아주 귀한데 이것이 결점이다.” 라고 적고 있다.
 
< 평양 위성영상지도 >
실제로 평양의 풍수지리적인 구도를 보면, 모란봉.을밀봉을 진산(鎭山)으로 하여 우백호의 양상은 을밀대―칠성문― 만수대로 이어지는 맥을 이루면서 뻗어내려 남쪽에 이르러 창광산(蒼光山)?서기산(瑞氣山)에 이른다. 좌청룡의 지맥은 을밀대에서 남쪽으로 용언궁지(龍堰宮址)를 품으면서 장경문에 이르러 끝나고 있다. 이 좌우 지맥의 안쪽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지고 있고, 좌청룡의 짧은 지맥을 보완이라도 하듯이 그 너머에 대동강이 바깥에서 포근히 둘러싸며 흐르고 있다.


이런 자연 지리만이 뛰어난 것이 아니다. 대동강과 보통강을 끼고 성곽을 길게 쌓고, 동 북으로 모란봉에 기대어 의지하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천혜의 군사 요충이 된다. 이러한 평양의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굳이 풍수지리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고조선의 수도로서, 이어서 고구려의 수도로서 오랫동안 그 영화를 누려온 것처럼, 평양은 나라를 다스리는 중심처로서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 동명왕릉에서 바라본 평양 >
<천도지인가 반역처인가 >
태조의 유훈 이후 과연 그의 뒤를 잇는 역대 왕들은 모두 서경을 중시하여 자주 행차하거나 이궁(離宮)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렇게 고려 전기 내내 왕실에서 서경을 중시하였던 이유가 단지 풍수지리적 입장만은 아니었다. 보다 현실적인 이유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코 서경이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고려 왕실의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우선 평양은 북으로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며 나아가서는 북진정책이나 고구려 고토회복의 상징적 의미까지 함축되어 전략상 요지로 중시되었다. 여기에 무엇보다 고구려의 계승을 내세웠던 고려로서는 서경이 바로 고구려적 이상의 계승처로서는 최적의 장소라는 점도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풍수도참의 입장을 내세우면서 고려왕들이 정치적 문제를 해결할 때도 종종 서경의 존재를 두드러지게 중시하였다. 이는 왕권의 배후세력으로서 서경 세력을 지원한 것과도 연관된다.


유서 깊은 도성이었던 평양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통일신라시대 이래 크게 황폐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고려는 건국 초부터 황해도지방의 백성을 옮겨 살게 하는 등 그 재건에 힘썼다. 성종 때에는 왕도인 개경과 경주 동경(東京)과 더불어 서경을 합하여 3경(京)제를 구성하였으며, 목종대에는 호경(鎬京)이라 칭하여, 동경이나 남경(南京)과는 다른 부도(副都)로서의 위상을 과시하였다.


무엇보다 고려 왕조가 서경에 대한 대우가 각별하였음을 보여주는 제도적 장치는 개경의 관아를 모방하여 서경에 똑같은 기능의 기관을 두었던 분사제도(分司制度)이다. 서경에는 개경과 마찬가지로 5부라는 행정구역은 물론 많은 관청과 심지어는 국자감, 태의감 등도 분사를 두었던 것이다. 나아가 역대 왕들 중에는 때로는 천도의 생각도 없지는 않았으며, 이러한 의중을 읽고 서경파들은 종종 서경 천도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런데 이러한 풍수도참적 이념이나 각별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 내내 평양 지역이 종종 반란의 중심지가 된 점은 이율배반적이다. 1009년에는 고려 목종 때 서경도순찰사 강조(康兆)가 반란을 일으킨 바 있고, 1135년에는 묘청(妙淸) 등이 난을 일으켰다. 또 무신난 직후 1174년에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어 다시 서경은 황폐한 상태가 되었다. 몽고군이 계속 고려를 침입해왔을 때에는 1269년에 서북면병마사에 소속해 있던 최탄(崔坦)이 난을 일으켜 서경을 점령하고 원나라에 항복하기도 하였다. 이 때 원나라는 서경에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하고 자비령(慈悲嶺) 이북의 땅을 원나라에 편입시키기도 하였다. 물론 90년 만에 고려에 반환되어 잠시 서경의 위상을 되찾기도 하였으나, 공민왕 때 평양부로 개칭한 이후 서경이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말았다. 이후 조선에 들어서도 관서지방의 중심지이기는 하였으나, 제2의 도성으로의 위상을 결코 다시 얻지는 못하였다.


고조선의 수도로 화려하게 역사에 등장하여 고구려의 수도로 빛나는 자리를 지켰던 평양은 잠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앉았다가, 다시 고려의 서경으로 그 이력에 화려한 한 페이지를 더하였다. 그러나 태조 왕건의 유훈도 무색하게 오히려 자주 반란의 거점이 되었던 데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지리(地利)가 아니라 인심(人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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