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고려 인종대에 일어났던 서경천도운동과 뒤이은 묘청(妙淸)의 난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묘청의 난이 실패한 것은 곧 자주적인 낭가사상을 가진 서경파가 사대적인 유교사상의 개경파에게 패배한 것이며, 그 후 조선의 역사는 사대주의에 빠져 수치와 오욕, 좌절과 비주체의 역사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고 탄식한다.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오직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였던 신채호 선생에게는 1천년전 ‘칭제건원’과 ‘북벌(금국정벌)’을 부르짖은 묘청이야말로 역사상 위대한 독립정신의 표상으로 비쳐진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 때 서경에서 일어난 한 사건으로 우리 역사의 물줄기와 국운이 크게 달라졌던 것일까?

 

 

<서경천도운동>
묘청 등이 주장한 서경천도운동이 당시 인기를 모았던 것은 의외로 나라 밖의 변화 때문이었다. 12세기에 들어서서 북방에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등장하면서, 고려의 대외관계는 급변하였다. 한때 고려 윤관의 정벌을 받아 고려에 복종하기도 하였던 여진족은 고려로부터 빼앗긴 9성을 돌려받은 6년 후에 여진의 아구타는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금이라 하였으며, 서쪽의 요나라를 굴복시키고 만주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처음에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받들던 금나라는 세력이 강해지자 고려에 형제관계를 요구하였고, 요나라를 정벌한 후인 1125년(인종 3)에는 `칭신사대(稱臣事大)’관계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대금 관계의 변화에서 당시 왕권을 누르고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자겸과 척준경 등은 반대를 무릅쓰고 금나라의 요구에 굴복하였다.

 

 

이러한 굴욕을 느끼는 정세 속에서 고구려의 자주성을 부르짖고 북벌을 내세우며, `칭제건원’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이는 당시 서경천도운동과 짝하여 더욱 확대되어 갔다. 이때 서경천도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이는 묘청이다. 그는 고려인의 민심을 사로잡았던 풍수지리설과 도참설을 주장하여 인종을 설득하였다. 묘청을 인종에게 추천한 사람은 서경파의 정지상(鄭知常)이었는데, 일관(日官) 백수한(白壽翰)과 더불어 묘청을 성현(聖賢)으로 받들며 나라 일의 최고 고문으로 추천하였다.


그 후 묘청은 “개경의 지덕이 쇠해졌기 때문에 수도를 서경(평양)으로 옮기면 천하를 합병하고 금나라가 폐백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126년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타고 개경의 민심이 흉흉해진 이 때, 묘청의 주장에 인종은 귀가 솔깃해졌다. 풍수상 개성은 주위가 산으로 조밀하게 둘러싸인 장풍(藏風)의 땅인데 반하여, 평양은 대동강이라는 큰 강에 면한 득수(得水)의 땅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묘청 등의 주장에 이끌린 인종은 1127년 이후 서경에 자주 거둥하며 천도에 관심을 기울였다. 게다가 묘청 일파는 대외정책에 있어서 칭제건원과 금국정벌을 주장하여 윤언이 같은 대외 강경파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점차 그 세력을 넓혀갔다.


이제 자신감이 생긴 묘청 일파는 1128년에 서경의 임원역(林原驛: 지금의 평남 대동군 신궁동)에는 대화세(大花勢)가 있으므로 그곳에 새로 대화궁(大花宮)을 세우면 천하통일을 이루고, 금나라 및 그 밖의 많은 나라가 고려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이라 하여 서경천도운동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인종도 그해 11월부터 신궁 건설을 명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궁궐이 완성되자, 서경에 거등하여 대신들에게 `칭제건원’과 `금국정벌’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하였다.

 

<다시 반란으로>
그러나 대화궁의 준공 후에도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서경 천도에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 대화궁 근처 30여 군데에 벼락이 떨어지고, 인종의 서경 거둥 도중에 갑작스런 폭풍우로 수많은 인마가 살상되는 등 불상사가 잇달아 일어났다. 이렇게 되자 서경천도를 반대하며 묘청 일파를 배척하는 목소리가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특히 자주파의 윤언이, 서경파의 정지상 등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김부식이 반대대열에 앞장섰다. 인종은 결국 귀족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서경 거둥을 그만두고 서경천도 계획도 단념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태가 뒤집어지자 결국 묘청 일파는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자비령 이북의 길을 막고 서북 여러 고을의 군대를 모두 서경으로 집결시킨 후,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라 선포하고,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불렀으며, 개경으로 진격해 들어갈 뜻을 밝혔다. 서경의 반란 소식을 들은 중앙정부는 김부식을 원수로 토벌군을 일으켰는데, 김부식은 출정에 앞서 묘청 일파인 정지상, 백수한, 김안(金安) 등을 참수하였다. 아마도 서경의 반란은 개경에 남아 있던 서경파들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진 듯하다. 이는 결국 이 반란의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게 하였다.

 

 

초기 기세와는 달리 서경의 반란은 일찍 패배의 조짐을 드러냈다. 승산이 없음을 안 반란군 주모자 조광 등이 묘청 등의 목을 베어 항복의 뜻을 표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항거를 시작하였다. 이후 서경민의 항쟁은 1년여를 계속하다가 굴복하고 말았다. 승자들은 끝까지 저항한 일부 서경민들의 얼굴에 ‘서경역적(西京逆賊)’이란 글자를 새겨 먼 섬으로 귀양보냈다.


황제국이 되고 금국을 정벌하려던 야망은 한낱 초라한 반란으로 끝나고 말았다. 아니 애초부터 그것은 허망한 꿈에 불과하였을지도 모른다. 진정 서경천도가 고려를 재부활시키려는 의도였다면, 풍수도참의 신비함보다는 부국강병을 위한 현실적인 개혁 방안을 택해야했을 것이다. 그랬으면 그의 꿈은 진정 성공한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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