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구성원들
한반도에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한국인들의 열망에 어긋나는 사건이 해방 후 4개월이 지난 1945년 12월 말에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졌다. 미국, 소련, 영국 3개국 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서 모여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통일 독립정부 건설을 위한 임시정부를 세우고, 이렇게 성립되는 임시정부는 미국, 소련, 영국, 중국 4개국에 의하여 5년 이내의 신탁통치(후견)을 받을 것을 결정한 것이다.



소련과 입장을 같이 했던 공산주의자들은 이 결정을 통해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도에서 신탁통치에 찬성한 반면, 민족주의자들과 대중들의 정서는 신탁통치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냈다. 북한 정치의 중심인 평남 인민위원회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충격적인 변동을 맞이하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대하여 조만식은 지지를 거부하였고, 이에 대해 소련군은 ‘연금’으로 대응하였다.



조만식이 반탁을 견지하고 조선민주당 당원들이 월남하거나 평남 인민위원회에서 이탈함으로써 평남 인민위원회의 좌우파연합은 상부에서부터 붕괴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조공분국)은 평남 인민위원회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며, 공산당 출신 간부가 많아지는 조직상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더불어 소련과 김일성이 주도하는 조공분국은 대규모 군중집회를 조직해가면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세력을 제압해 나갔고, 조선민주당과 천도교청우당도 위성정당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소련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1946년 2월 8일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북임인위)를 수립하여 1945년 10월에 조직된 행정10국을 대체하였다. 북임인위는 사실상 단독정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고, 소련군의 북한정치에 대한 관여는 점차 축소되고 조선인의 역할이 확장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북임인위 위원장에 추대된 김일성은 조공분국의 지도자로서보다 북임인위 위원장으로서 대중적인 명망과 위상을 강화하고자 하였는데, 북임인위 위원장이라는 직책은 김일성에게 인민의 최고지도자라는 위상을 심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공분국과 국가기구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김일성은 북임인위 위원장이 됨으로써 국가권력을 통하여 정치기구와 당에 대한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또 이 시점에 군과 보안기구가 항일유격대 출신세력에 의하여 장악되어 감으로써 김일성의 권력 기반을 확충하였다. 이로써 김일성은 중앙의 국가기구를 주도하여 당조직을 확대 강화시키고, 다시 중앙과 지방의 국가기구를 당이 주도하는 변화를 이루어냈다.



북임인위는 비록 소련과의 협의를 거쳐야 했지만 모든 법령과 결정의 초안을 북임인위 산하의 각 국이 작성하게 되어 중요한 정치적 결정이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실질적인 권한을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김일성은 정치기반을 강화해감에 따라 하부에 대한 지도능력을 확대하였으며, 북임인위는 점차 교육 훈련과 재정 등 모든 면에서 지방인민위원회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 갔다.
<필자 : 이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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