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로동당창립대회에서의 김일성(1948. 8)
1945년 말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결정에 대한 반대로 조만식이 권력구조에서 탈락하고, 3월 5일에 실행된 토지개혁으로 북한사회내의 계급질서가 완전히 재구축된 데 맞는 새로운 정치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1946년 초에는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조공분국)이 소련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개편되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어 북한지역에 대한 통일적인 행정조직의 기반도 갖추어졌다.



조공분국은 조선민주당의 위성정당화를 추진하였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조선독립동맹 세력이 창립하여 당원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던 조선신민당을 흡수하여 북한지역에 대한 통일적인 당조직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조선신민당이 중농계급과 지식층을 중심으로 당원 증가가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조공분국에게는 적절한 대처가 필요했던 것이다.



특히 양당의 조직에서 나타나는 마찰과 대중의 분열을 막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 통일적인 지도를 해야 할 필요성이 조공분국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양당의 통합을 추진하게끔 하였다. 즉 조공분국은 유사한 강령과 계급기반을 가진 두 개의 정당이 존재하는데서 오는 국가기구 운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신민당과 합당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신민당으로서는 정당으로서 중앙에서 갖는 위상에 비하여 지방하급 인민위원회와 국가 권력기구내에서의 영향력이 매우 약했기 때문에 국가권력에 접근하기 위해서도 합당이 실질적으로 필요하였다.



이러한 필요성이 커지는 시점인 1946년 7월, 김일성과 박헌영은 비밀리에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을 만나고 돌아왔다. 스탈린의 환영을 받고 평양으로 돌아온 김일성은 주도적으로 양당의 통합을 추진하였고, 양당은 신민당의 통합제의를 조공분국이 동의하는 형식을 밟아 8월에 합당대회를 열고 ‘대중정당’을 표방하는 ‘북조선로동당’을 출범시켰다. 박헌영도 남한으로 돌아와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을 묶어 남조선로동당 출범을 추진하였다.



북조선로동당(북로당) 창립대회에서 김일성은 자신보다 23살이 많은 조선신민당 위원장 김두봉에게 위원장 자리를 양보하고, 부위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남한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영향력도 강화해갔으며, ‘상부의 결정에 대한 하부의 절대적인 복종’이라는 당조직 원칙을 강화하여 당내부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했다. 북로당의 당원도 급격히 확장되었으며, 안정된 당세를 바탕으로 당내의 통일성을 강화하고 당원을 정예화했다.



북조선로동당은 당세력 확대를 바탕으로 인민위원회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였고, 1946년 11월 3일에 도·시·군 인민위원회 위원선거와 1947년 2월에 리(동)·면 인민위원회 위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는 북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위원후보자를 추천하고 흑백함 투표를 진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인민위원회 위원의 31.8%를 북조선로동당 출신이 차지하였다. 이들 외에 무소속이 50.1%를 차지하였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북로당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단체의 구성원들이었다. 따라서 절대 다수의 인민위원회 위원들에 대한 북로당의 영향력이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시·군 인민위원회 3,459명의 위원선거 후인 1947년 2월에 도·시·군 인민위원회 대회를 열어 최고입법기관인 북조선인민회의를 설치하였다. 여기에서 최고행정기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발포한 법령을 승인하고 북조선인민위원회로 개편하여 법적으로 합법화시켰다.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에는 김일성이 결정되었는데, 북조선인민위원회 최고간부 22명중에서 16명이 북로당 당원으로 구성되어 북로당이 국가기구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북로당과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인적으로 중복되어 북로당 출신이 요직을 장악하였으며, 행정 업무는 기본적으로 북로당의 통제하에 있었다. 북로당은 북한체제를 주도하는 영도정당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고 북조선인민위원회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이끌어 가는 핵심조직으로 기능하였다.



<필자 : 이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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