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관광 안내도>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일개 지방 도시 – 실제로는 ‘도시’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 정도의 마을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 였던 개경은 후삼국시대, 한반도의 새로운 패자를 기다리던 그 때에 서서히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이 시기 통일신라는 송악, 개성, 한산주 일대에 상당한 축성작업을 하였고, 왕건의 조상인 호경이라는 인물이 백두산에서 개경으로 들어온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이것이 <고려사>에서 기록하고 있는 개경과 왕건 집안의 관련을 알려주는 최초의 신화이다.

백두산에서 긴 여로를 거쳐 부소산(송악산) 왼편 골짜기에 자리잡은 호경은 강충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는 서강(예성강) 영안촌의 부자집 딸과 결혼하여, 오관산 마하갑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풍수에 능하다는 신라의 팔원이라는 사람이 와서 부소산에 나무가 없는 것을 보고, 여기에 나무를 심고, 군(郡)을 이 남쪽으로 옮기면(당시에는 북쪽에 있었다) 삼한을 통합하는 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 예언을 믿어서였는지 강충은 군을 옮기고, 사람들과 함께 산에 소나무를 심어 군명을 송악군으로 고쳤다.

 

<한반도 위성영상사진>

 

강충의 둘째 아들은 중이 되어 지리산까지 편력하는 등 역마살이 다분한 인물이었지만, 결국 마하갑으로 돌아와 암자를 짓고 살게 되었다. 술사가 여기서 살면 당나라 천자가 사위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당의 숙종(혹은 선종)이 천하를 유력하다가 송악산에 이르러 남쪽을 보고 도읍을 이룰 만한 곳이라고 감탄하고, 보육의 집에 머물러 그의 둘째 딸과 정분을 맺고 아들을 낳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가 작제건이었다. 동방의 왕이 되려면 ‘건’자 이름으로 삼대를 거쳐야 한다는 예언을 받고 서해 용왕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는 예성강변에 영안성을 짓고 살다가 송악산 남쪽 기슭이 또한 좋은 터라는 징조에 두 곳을 왕래하며 살게 되었다.
작제건의 맏아들이 바로 왕건의 아버지인 세조 용건이었고, 그는 도선과 우연치않게 만나 이곳의 지맥에 대한 조언을 얻었다. 그의 아들 왕건 역시 17세가 되었을 때 도선을 만나 군사 지휘법, 진치는 법 등 여러 가지 지식을 얻었다고 한다.

이상의 내용이 <고려사>에 실려 있는 왕건의 조상내력에 대한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왕건의 조상과 도읍이 된 송악을 신비화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는 설도 많지만,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해본다면 이는 당시 사람들의 국토 풍수에 대한 인식과 왕건 집안이 개경에 자리잡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동여지도 개경 부근>

 

백두산에서 온 호경이 송악산에 자리잡고, 그의 손자가 지리산까지 내려가는 그런 과정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지리산까지 그 맥이 뻗어나간다고 보는 우리 국토에 대한 인식이 이때에 이미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송악산 북쪽에 자리잡았다가 남쪽으로 옮기는 과정은 풍수상 개경의 주산변천과정을 알려주기도 한다. 강가인 영안성과 산곡의 송악산 터를 왕래하는 모습은 바다와 강을 이용한 교역의 중요성과 산악을 이용한 방어의 모습을 추론하게 해주기도 한다.
호경을 위시한 왕건 집안의 내력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히 알려진 바는 없다. ?고려사? 세계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허구와 위조로 보는 견해도 있고, 믿을 만한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부분적으로만 인정한다던가, 설명하고 있는 사실을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호경으로 대변되는 그 집단을 고구려 부흥을 꿈꾼 패서인으로 보기도 한다. 이미 신화로 묻혀 버렸지만, 이때 그들이 개경으로 들어온 것, 그리고 그들의 후손이 고려를 건국한 것은 한반도의 중심을 경주에서 중부 개경으로 바꾸어놓는 첫 단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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