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권역 위성영상지도>

 

 

개경은 조선의 수도 한양과 함께 한반도의 중앙부를 차지한 지역으로서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에 위치하며 남쪽으로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한 강화 북안(北岸)과 연접하여 있다.
풍수상 가장 중요하게 보는 산세(山勢)를 따져보면, 개경은 백두대간에서 비롯된 임진북예성남정맥의 정기가 맺어진 천마산·송악산·진봉산의 맥에 위치하고 있다. 개경 부근에는 산세가 그다지 험준하지는 않고 얕은 산 위주의 구릉지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산들이 낮기는 하지만, 주위를 빙 두르고 있어, 개경은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분지를 이루고 있다.
개경의 주산은 송악산이다. 송악산은 마치 웅장한 병풍을 편 것 같이 정방형의 모습을 띠고 있어 기운이 뭉친 주산으로서 손색이 없다. 좌청룡은 자남산을 내청룡, 덕암을 외청룡으로 하고 있다. 우백호는 오공산이다. 그리고 전주작(前朱雀)은 주작현, 안산은 용수산이 된다.

 

<개성 위성영상지도>

 

내청룡과 내백호, 그리고 주산과 주작으로 이루어진 범위를 내국(內局)이라고 한다. 그리고 외청룡과 외백호, 그리고 주산과 안산으로 이루어진 범위를 외국(外局)이라고 한다. 개경의 경우 내국은 자남산·오공산·주작현으로 형성되고, 외국은 우백호를 공유하면서 덕암·오공산·용수산으로 형성되어 있다. 내국과 외국의 이중으로 둘러싼 안에 있는 중앙 만월대터가 부소명당 혹은 송악명당이라고 일컬어진 곳이다.
만월대의 내국에서 모아지는 한 줄기와 자남산 동측의 선죽교를 지나는 한 줄기, 그리고 오공산의 남쪽에서 동으로 흐르는 세 줄기 개천은 개경의 젖줄이다. 이 세 줄기는 내성의 남대문 밖에서 합수되어 동남방의 보정문 아래 수구문을 통해 성밖으로 흘러 나가 사천에 합류하여 임진강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개경은 국면(局面)이 좁으면서, 지세상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모두 중앙으로 모이기 때문에 여름철 강우기에는 물흐름이 거칠고 급격하여 순조롭지 못한 결점이 있다. 그 때문에 일제시기에 만월대에서 빠져나오는 물줄기를 동쪽으로 직선으로 터서 홍수를 예방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물의 합류점 부근에 세운 광명사·일월사·개국사 등은 거친 물을 진압하
고자 한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세워진 절이라는 시각도 있다.

 

<개경 고지도(1872년)>

 

개경은 명당이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고려시대부터 이미 여러 가지 이론(異論)이 제기되곤 하였다. 문종 때부터 땅의 기도 쇠할 때가 있다는 지기쇠왕론에 근거한 지리도참설이 계속해서 제기되었다. 이때에는 다른 곳의 왕성한 지력을 빌려 개경의 지력을 연장하고자 하여 이경(離京)과 이궁(離宮)이 건설되었다. 숙종 때에는 남경(南京 : 지금의 서울)천도론이 제기되어 궁궐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그 다음 왕인 예종은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의 지력을 빌려고 궁궐을 조성하였고, 그 탄력을 받아 인종 때에는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으며, 결국 반란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의종 때에도 다양한 지리도참설이 등장하여 여러 곳으로 연기궁궐(延基宮闕)의 터를 보러 다니기도 하였다. 명종 때에는 세 군데의 이궁, 즉 삼소궁(三蘇宮)을 경영하였다. 그뿐인가? 신종 때에는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이라는 풍수와 관련한 임시기관을 설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강화도 천도 시기에도 여러 형태의 도참설이 나돌다가 공민왕 때에 이르면서 본격적으로 다시 천도논의가 제기되었다. 당시 한양·백악·강화·평양·충주 등 여러 지역에 대해 천도논의가 있었고, 이중 백악으로는 실제로 천도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우왕 때에는 극심해진 왜구의 위협 때문에 내륙지역으로 천도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잠시 남경으로 천도하기도 하였다. 공양왕 때 역시 한양으로 천도한 적이 있었다.
정말 좋은 땅, 용도에 걸맞는 땅이 있을지도 모른다. 왠지 그 땅의 사람들을 부유하고 행복하게 해줄 그런 땅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땅을 만들어가는 것은 바로 사람이다. 송악산 주변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이곳저곳을 탐색했던 왕건의 조상은 바로 그 점을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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