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지에 성을 건설하는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 나라에서는 주변 산세를 이용하여 성곽을 쌓았다. 산지가 많은 국토의 조건을 효율적으로 이용한 조상들의 지혜라고 할 것이다.
개경은 박연폭포가 있는 천마산에서 두문동 72인의 고장인 만수산까지 이어지는 산세가 한 차례 외곽을 감싸주고, 북쪽의 송악산(489m)으로부터 남쪽의 용수산(177m)으로 연결되는 구릉들이 다시 그 안을 조여주는 지형으로 되어 있다. 수도 개경의 성곽은 바로 안쪽의 산세를 연결한 것이었고, 바깥 산에는 산성을 두어 그 배후를 보호하였다.
수도 개경에 제일 먼저 세워진 성곽은 896년에 세워진 발어참성이었다. 고려가 건국하면서 개경은 황성과 나성을 차례로 정비해가게 되었고, 조선이 건국된 후인 1393년에 내성이 건설되었다.

 

 

<황제의 성, 황성>

 

황성이 존재하였다는 것은 누구나 의심하지 않지만, 자료상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다. <고려사>에서는 그 둘레(2,600칸, 약 4.7km)와 20개의 성문 이름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서쪽의 대문이었던 선의문이나, 정동문이었던 광화문(조선시대 경복궁 앞의 광화문과는 한자가 다르다) 같은 몇몇의 성문은 이름이 전해지나, 대부분의 성문은 대략의 방위 정도밖에는 짐작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
황성문 중 가장 스타급이라고 한다면 동쪽으로 향한 황성의 중심문, 광화문을 들 수 있다. 이 문은 궁성의 승평문과 같이 3문 형식으로 가운데 문은 왕과 중국 사신들이 주로 이용하였고 일반 사람들은 좌우 문만을 이용할 수 있었다. 좌우 문에는 몇 가지 유교적 덕목이 걸리기도 하였고, 봄날이면 ‘입춘대길’ 같은 문구를 걸기도 하였다.

성문은 사람들의 출입을 제어하여 수도를 방어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국가의 중대사를 알리는 장소로 쓰이거나, 이러저러한 사건들에 얽히는 일이 생기는 곳이었다. 1009년(목종 12) 2월, 재위 12년 만에 강조의 정변으로 임금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 어린 임금 목종은, 정문인 광화문을 이용하지 못하고 북쪽 후원의 선인문을 통해서 귀법사로 쫓겨났다.

 

 

<서울을 지키는 성, 나성>

 

개경의 나성은 궁성, 황성, 그리고 일반 거주지인 5부방리 등을 포괄했던 성곽이다. 이는 1009년(현종 즉위)에 축성 논의가 있은 이후, 거란 침략과 내부 반란 등 대내외적인 상황으로 공사가 늦추어지다가, 거란 침략을 격퇴한 이후 1020년 8월에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다시금 공사에 박차를 가하여 1029년에 비로소 완성한 것이었다.
당시 나성 축조사업에 참여한 연인원은 인부 30여만 명과 장인 8,450명이었다. 이렇게 대대적인 국가 사업에 의해 이루어진 나성은 고려시대 축조물의 상징이자 고려인들의 자부심 그 자체였다.
나성은 그 둘레가 약 23㎞로, 조선시대의 한양성이 약 18㎞이었음을 고려하면 상당히 넓었다고 할 수 있으며, 성문 역시 한양성이 8개였던 것에 비해 25개로 매우 많았다. 우선 4개의 대문을 꼽아보면, 숭인문ㆍ장패문ㆍ회빈문ㆍ선의문 등이 있다.
숭인문은 동쪽 성문으로서 조선초기에 내성이 축조된 이후 외동대문으로도 불렸고 수구문이 딸려 있었다. 이 성문 안쪽에는 목청전이 있었으며, 동쪽으로 나가면 홍호사가 있었고, 군대의 사열, 격구 놀이, 왕이 태묘에 제사하고 돌아오는 길 등의 역할을 하였다. 장패문은 오늘날의 보정문 터이며, 동남쪽의 성문으로서 수구문을 끼고 있었다. 회빈문은 오늘날의 고남문 터이며, 남쪽의 성문으로서 국토의 남쪽 혹은 강화도로 내려가는 주요 관문이었다. 선의문은 오늘날의 오정문 터로, 정서쪽의 성문으로서 국왕과 사신의 행차에 이용되는 중요한 성문이었다. 이 문을 지나면, 나성으로부터 30리(약 14㎞) 떨어져 있던 예성강 입구의 벽란정으로 가는 길이 펼쳐졌다.
대문은 전투가 벌어졌을 때, 누가 먼저 이곳을 점령하느냐가 승패를 판가름할 정도로 중요하였다. 1388년(우왕 14) 6월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을 단행하고 개경을 장악하기 위해 숭인문 밖에 주둔하였다. 이성계는 숭인문을 통하여 나성 안으로 들어갔고 도성 안에서 저항하던 최영을 물리치고, 도성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것이 조선 건국의 직접 계기가 되었음은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나성의 성문들은 교통. 주거. 유동인구. 군사 등 여러 기능들을 고려하여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성의 25개 성문은 황성의 성문과 더불어 성곽의 방어에서는 불리하였지만, 오히려 도시의 효율적 이용 혹은 도성 외곽과의 유기적 관계에서는 유리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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