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영화촬영소 현지지도

김정일과 영화

 

김정일이 영화광이며, 그의 지시에 의해 외국의 수많은 영화 필름 등이 북한에 소장되어 있다는 소문은 여러 북한 경험자들의 발언과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김정일의 이러한 행동과 취향의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어왔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사람의 외로움이나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선전선동 정책에 의해 영화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한 개인이 영화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배경을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한 일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역사적 맥락과 정치적 상황 속에서 설명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김일성을 비롯한 혁명 1세대들은 항일투쟁과 건국 그리고 미국과의 전쟁 등을 통하여 자신들의 지배 명분을 만들었다. 반면 김정일 등 혁명 1세대들의 자제들은 자신들의 통치 명분을 다른 곳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는 대중들을 통치하는 명분인 동시에 혁명 1세대들로부터 권력을 이양 받을 수 있는 명분이기도 했을 것이다. 김정일이 개인적으로 영화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특성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1968년을 전후로 북한은 김일성 일파의 권력 장악기로 넘어가게 된다. 이 시기는 김일성이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조선 현실에서의 창조적 적용’이라는 기존의 사고를 넘어서 당시 수정주의의 혐의를 받고 있던 소련 공산당의 이론이나 좌경으로 인식되던 모택동 사상과 ‘가장 정확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두고 경쟁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즉 주체사상이 보편적 이론화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형태로 볼 수 있는 이러한 현상은 김일성 개인숭배와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1968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이때 김정일은 1967년 이후 두각을 드러낸 후 김일성의 혁명 동지였던 김책의 아들 김국태가 노동당 선전선동부장이 되자 그와 함께 사상문화 분야의 장악에 들어간다. 김정일은 ‘조선로동당력사연구실’을 ‘김일성 동지 혁명력사연구실’로 개칭하는 등 김일성 개인숭배와 주체사상의 유일사상화 과업에 깊숙히 개입했다. 이 시기 김정일이 직접 지도하던 문학예술인들 사이에서 그를 1969년경부터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 시기 예술영화에서는 〈피바다〉와 〈꽃파는 처녀〉 등 김일성이 직접 항일투쟁기에 연극으로 공연했던 작품을 영화화하는 작업이 벌어졌고, 기록영화로서는 김일성 일가를 그린 기록영화 〈만경대〉(1969), 〈우리의 어머니 강반석 여사〉(1969) 등 김일성 가계가 혁명적 가계였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강조하는 영화들이 나왔다. 이러한 영화 작업들은 거의 모두 김정일의 지도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김정일은 ‘김일성 개인에 대한 강조’로 영화 제작 정책의 본질적인 전환을 하게 된다. 즉 김정일의 영화관은 개인적 취향과는 별개로 김일성 유일 권력의 대중적 설득력을 구하기 위한 방편인 동시에 자신의 사회적 능력을 입증하는 방편이기도 했던 것이다.

 

<필자 : 이효인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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