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당 간부에 이례적 ‘지도’ 표현…의미는? (2020.09.02)

北, 당 간부에 이례적 ‘지도’ 표현…의미는?

지난주 제8호 태풍 ‘바비’가 휩쓸고 간 뒤 북한은 요즘 태풍피해 복구에 한창입니다. 제9호 태풍 ‘마이삭’이 한반도로 다가오면서 다시 태풍 대비를 강조하는 가운데, 최근 당 간부들이 잇따라 태풍 피해 현장을 찾아 복구 작업을 지휘하고 대책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보도하는 북한 매체의 태도에 과거와는 다른 일련의 변화가 감지됩니다. 이례적으로 당 간부들의 현지시찰 소식과 사진을 노동신문 1면에 배치하더니, 이번에는 그동안 최고지도자에게 쓰던 ‘지도’라는 용어를 당 간부들에게도 사용한 겁니다.

[연관기사][취재K] 北, 박봉주·김덕훈 ‘부각’, 김여정은 ‘잠행’…이유는?

■ 군사담당 리병철까지 급파… 태풍피해사업 ‘지도’ 보도

1일자 북한 노동신문의 1면 머릿기사는 리병철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과 박봉주 노동당 부위원장의 태풍피해현장 방문 기사였습니다. 지난달 30일자 1면 톱에 박봉주 부위원장과 김덕훈 내각총리의 태풍피해 현장 시찰 기사를 실었을 때와 비슷한 지면 편집으로, 두 사람의 현장 사진도 나란히 실었습니다.

9월 1일자 북한 노동신문 1면. 리병철과 박봉주의 현지지도 기사를 1면 머릿기사로 실었다.9월 1일자 북한 노동신문 1면. 리병철과 박봉주의 현지지도 기사를 1면 머릿기사로 실었다.

그런데 지난달 30일자보다도 더 파격적인 점이 눈에 띕니다. 바로 당 고위간부들이 태풍피해 복구사업을 ‘지도했다’는 표현을 사용한 점입니다. 노동신문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이며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인 리병철 동지가 황해남도 장연군 눌산협동농장, 창파협동농장, 학림협동농장에서 태풍피해 복구사업을 지도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리병철 부위원장은 북한의 핵·미사일 등 전략무기 개발 주역으로, 북한 권력의 핵심인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5명 가운데 군사 담당이라는 점에서 이같은 민생 현장 방문 자체가 이례적이기도 합니다.

노동신문은 이날 리병철 뿐 아니라 다른 당 고위간부들에게도 역시 ‘지도했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바로 옆 박봉주 부위원장의 태풍피해 복구 사업 지도 기사를 비롯해 “당 중앙위 부위원장들인 김재룡 동지, 리일환 동지, 최휘 동지, 박태덕 동지, 김영철 동지, 김형준 동지가 태풍의 영향을 크게 받은 황해남도 장연군, 태탄군 여러 농장의 피해복구 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했다”고 전했는데요. 박봉주와 같은 경제 담당 관료 뿐 아니라 대남·국제·군사 분야를 망라하는 고위 간부들이 태풍피해 현장에 일제히 나섰고, 이들의 활동을 그간 현장 ‘시찰’ 또는 ‘료해(요해)’ 정도로 썼던 것과 달리 현장을 ‘지도’했다는 용어를 사용한 겁니다.

이에 대해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파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정 센터장은 “북한은 과거 김정은 위원장이 아닌 고위 인사의 현지시찰에 대해 현지의 상황을 파악한다는 ‘현지요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지도’라는 표현은 김정은 위원장과 노동당에 대해서만 사용했다”며 “이번에 리병철과 박봉주 그리고 다른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들에게도 ‘지도’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김 위원장이 이들에게 현지시찰시 실무적인 ‘지도’까지 할 수 있도록 공식적으로 권한을 부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도 “북한에서 ‘지도’라는 말은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라며 “최고지도자가 할 수 있는 통치행위 중 하나가 ‘현지지도’인데, 이 용어를 간부들에게 쓴 것은 책임을 분산하면서 그만큼 역할의 비중을 높여주는 식으로 통치행위 전반에 있어 약간의 조정이 있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권력을 이양한다는 개념보다는 각각의 영역에서 일종의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정도로, 그 권한과 책임성을 높여준다는 뜻으로 보인다”고 덧붙였습니다.

■ 당 간부들 활동, 최고지도자 동정보다 위에 ‘파격’ 배치

눈길을 끄는 것은 또 있습니다. 이들 고위 당 간부들의 태풍피해 현장 방문 사진이 노동신문 1면에 김정은 위원장의 동정보다 위에, 더 크게 배치됐다는 점입니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특이할 것이 전혀 없는 지면 배치이지만, 북한에서는 사실 최근까지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앞선 기사에서도 다뤘지만, 노동신문 1면 톱 자리는 사실상 최고지도자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9월 1일자 노동신문 1면에 실린 김정은 위원장의 동정 기사. 당 간부들의 현장 지도 기사보다 아래쪽에 비교적 작은 비중으로 실려 있다.9월 1일자 노동신문 1면에 실린 김정은 위원장의 동정 기사. 당 간부들의 현장 지도 기사보다 아래쪽에 비교적 작은 비중으로 실려 있다.

이날 노동신문 1면은 리병철과 박봉주의 현장 지도 기사를 머릿기사로 했고, 그 바로 아래 좌하단에도 당 간부들의 활동을 다룬 기사와 사진들이 배치돼 있습니다. 그 오른쪽 김정은 위원장이 여성 항일빨치산 박경숙의 사망을 애도하는 조화를 보냈다는 기사가 있는데, 박봉주 부위원장의 기사 아래쪽에 짤막하게 실린 것이 전부입니다. 사소한 동정 기사라도 통상 최고지도자의 소식을 맨 앞에 배치, 보도해 온 관례를 깬 셈입니다. 앞서 8월 30일자에 박봉주와 김덕훈의 현장 시찰 기사가 1면 톱을 장식한 것도 전례를 찾기 힘든 이례적인 보도였는데, 한 지면에 최고지도자의 소식이 함께, 더 적은 비중으로 실린 1일자 지면 배치는 이 같은 파격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평가입니다.

정성장 센터장은 “과거 김정은 위원장의 공개활동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해외 순방외교 정도에만 할애했던 1면 지면에 다른 고위 간부들의 현지요해 또는 현지지도 사진을 게재함으로써 핵심 간부들의 위상을 더욱 높여주었다”며 “김정은 식의 ‘위임통치’가 계속 진화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 코로나19에 태풍…”위기 속 ‘책임 분산’과 ‘안정성’ 추구하는 듯”

북한 당국이 이 같은 파격적인 모습까지 보이면서 당 고위 간부들의 태풍피해 복구 활동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우선 만성적인 경제난과 코로나19 와중에 홍수와 태풍 피해까지 겹친 상황을 엄중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이처럼 악재가 겹친 일종의 위기 상황에서 최고지도자 1인이 모든 것을 지도하고 책임지는 것 보다는 당 간부들도 나서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주민들에게 지도력의 안정성을 강조하고, 또한 책임도 분산시키는 효과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홍민 실장은 “위기가 겹친 지금 국면에서는 온전히 김정은 위원장에게 책임이 전가되는 방식보다는 여러간부들의 지도 활동 속에 책임을 분산시키는 의미를 갖고자 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며 “당 지도부가 모두 나서 적극적으로 수해 현장을 찾고 대책을 지시하는 등의 모습으로 당 지도력의 안정성도 강조하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만 이것이 전반적인 통치 방식의 변화라고까지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는데요. 그는 “앞으로 태풍피해 복구사업 이외 다른 영역에서도 이들이 계속 이런 방식으로 등장할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라며 “또한 이들의 활동이 부각된다고 해서 당장 최고지도자의 절대성이 훼손되거나 약화된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덧붙였습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기본적으로 과거보다는 많은 권한과 책임을 위임하는 형태로 국정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며 “이는 김정은의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고, 어찌보면 지도자 한명이 모든 일을 다 직접 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면서 당 고위간부들의 전면 등장과 ‘지도’ 표현이 이례적이긴 하지만, 과대 해석할 문제는 아니라고도 했는데요. 임 교수는 “간부들의 활동이 많아지긴 했지만 이들의 언행을 보면 권력자로서 행세한다기보다는 일거수일투족을 최고지도자의 지시에 의해 위임을 받아 지도하는 모습이고, 이들이 역할을 잘하면 결국 최고지도자의 공으로 귀결되는 것”이라며 “권력이 분산된다는 측면 보다는 오히려 김정은의 매우 실용적인 통치스타일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습니다.

지난주 태풍 ‘바비’ 때도 종일 태풍 특보를 내보내는 등 피해 예방에 총력을 기울였던 북한은 9호 태풍 ‘마이삭’이 한반도로 다가오고 있는 1일부터 이미 수시로 조선중앙TV를 통해 기상예보를 내보내는 등 태풍 대비태세에 들어간 모습입니다. 최근 보여준 일련의 파격적인 변화들이 태풍 피해 등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것인지, 통치방식의 변화로까지 이어질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 이효용 기자

목록보기